아이와 함께 자라는 지구 한바퀴
지난 여름,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한 달간 보내면서 2주는 런던과 주변 지역 여행, 나머지 2주는 런던 외곽 윔블던에 있는 여름 캠프를 보내 놓고 나는 혼자 놀러다닐 때의 이야기다.
런던 윔블던역 근처에 있는 헌책방 -
평일에 아이 캠프 데려다 주고 픽업하러 매일 가게 되는 윔블던역 주변에 뭐가 있나 찾아보다가 구글에서 평이 워낙 좋아 찾아갔다.
오래되어 보이는 간판이랑 가게 앞에 책 쌓아놓은 모습부터 자고로 헌책방이라면 이래야지말이지~ 하는 이상적인 헌책방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내부는 영국 가정집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방방마다 책이 가득 쌓여 있다. 진짜 말 그대로 책을 둘 수 있는 곳에는 전부다 책이 들어차 있다.
펭귄북스는 별도 서가에 꽂혀 있다.
모아놓기만 해도 예쁜 펭귄북스! 내가 아는 펭귄북스 팬들 많은데 여기 한 번 오시려면 책 담을 수트케이스는 필히 별도로 갖고 오셔야 할 듯. ㅎㅎ
나에겐 헌책의 냄새가 가득한 정감있는 모습이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다 싫어할 것 같은 꼬라지. 우리 집도 이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에 비례해서 등짝 스매싱 파워가 누적되고 있다.
주인장께 어린이 책이 있는 곳을 찾으니 계단 밑으로 안내해 주신다. 사진 좌측의 계단 밑 공간에 어린이 책들이 왕창 쌓여 있다. 바로 해리포터의 방이 있던 계단 밑 공간이다. ㅎㅎ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주인아저씨 말마따나 가히 크레이지 북숍이다.
책무더기들은 책방 주인만의 질서에 의해 놓여져 있는 건지 아니면 책을 고르러 온 사람들이 꺼내서 쌓아 놓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장 가까운 서가의 분류와 연관이 있는 것들이 쌓여 있다. 어느 책장, 어느 더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을 만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책 더미들을 다 뒤져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헌책방의 매력이랄지 마력이 아닐까?
요즘 책의 발견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여기야말로 책을 발견하는 것조차 탐험과 놀이가 될 수 있는 책의 테마파크... 는 아니고 책의 창고가 아닐까? (결국은 창고라는 이야긴가?)
대략 그 근처에 있는 책들의 분류만 종이에 써붙여 놓고 그 주변에 책들이 쌓여 있다. 몸을 돌리거나 서가에서 책을 뽑을 때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른 쪽에서 책 탑들이 우르르 무너진다. 조심조심.
책장들도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책 뽑다가 책장에 박힌 못이 뽑힐 지경이다. 조심조심.
이렇게 위험한 헌책방이다 보니 계단참에는 가방은 주인에게 맡겨두고 가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다.
실제로 저 무질서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균형점에서 책 한권만 빼내면 온 건물이 부서질 것 같은 광경을 가서 보게 되면 이 문구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안내문의 다음 장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 생기는 모든 문제는 다 네 책임이거든~" 이라고 씌여져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영어로.. "Unless all damage is yout fault" 뭐 이런 식? 영어로 어떻게 써야 될 지 모르겠다 ㅎㅎ
여기는 상당한 노인 두분이 운영하고 있는데.. 상당하다는 표현은 이분들이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두워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 나이로는 70대 이상인 것 같은, 노인치고는 상당히 노인이다..와 비슷한 의미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연륜과 내공이 켜켜이 쌓인 진짜배기 고급 노인?의 이미지다.
이 분들이 '너 왜 왔니?' '원하는게 뭐니?' 하고 물어보신 후 원하는(원할 것 같은) 책들을 찾아 옆에다 척척 쌓아 주신다. 그런데 이 추천의 스펙트럼이 실로 다양하여 깜짝 놀랄 정도다.
아이가 기차를 좋아한다고 하니 추천해 주신 증기기관차와 영국 철도에 대한 책들부터 1940년대에 출판되어 본인들이 자녀를 키울 때 널리 읽혔던 손바닥만한 어린이용 책들까지. 그리고 최근에 나온 책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출간된 지가 오래 되었거나 초판본, 희귀본 등은 꽤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책들이 서로 다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우연히 뽑아 든 책이 엄청난 희귀본일 수도 있으니 시간만 있다면 매일 출근해서 서가를 싹 훑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하나하나 훑어 보는 시간에 책들이 팔려 나가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테니 매일 출근해야겠지만.
한국에는 이제 알라딘 같은 기업형 중고서점을 제외하고는 헌책방이 거의 없어졌다고 하니 근처에 한국인들이 많고 자기 서점에도 많이들 찾아와서 한국 출판시장이나 서점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신다. 오~ 대단하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책을 참 많이 사 간다고 반가워하신다. 이런 어찌보면 사소한 특징들이 그 나라 사람들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국위선양까지 할 수 있으니 관광객이나 유학생들이 민간외교관이란 말이 괜한 이야기는 아니다 싶다.
영국에 와서 철도에 관심이 많아진 아이를 위해 철도와 증기기관차 관련된 책들, Eyewitness 시리즈 로빈훗, ladybird children's classic 시리즈, 그리고 가운데 옛날 책 한 권 ㅎㅎ
어린이를 위한 셰익스피어 책인데 검색해보니 80~100년은 된 듯.
물론 아이가 읽으려면 5년 이상 기다려야겠지만 나중에 이 낡은 책을 보면서 책과 작품의 기원에 대해 관심갖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그 전에는 내가 좀 봐야지..
큰 책들은 5파운드, 작은 책들은 1~3파운드.
어찌보면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간과 100년 이상 된 책들이 서가에 같이 자리를 잡고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체험하는 비용으로 생각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
책장에 코 처박고 뒤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한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주인아저씨와 어디서 왔느냐, 여기 얼마나 있느냐, 런던 어디가 좋더냐 이야기하던 중, 우리는 런던 시내도 좋지만 런던 근교가 좋더라 하니 리치몬드 파크는 꼭 가보라 하고, 런더너로서 추천하자면 런던 사우스뱅크쪽 템즈강을 따라 꼭 걸어보기를 권해 주셨다 - 전통과 현대 건축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그리고 큐 가든 등 가볼 곳 몇 군데를 종이에 적어 주셨는데 책 고르다가 서점 안 어딘가에 놔두고 왔다. ㅡㅡ
이국의 여행자를 위해 정성스럽게 연필로 적어 주신 메모지도 찾을 겸 다시 한번 가 봐야겠다.
런던이나 유럽에서 헌책방 방문은 헌책마을로 유명한 헤이-온-와이 hay-on-wye 처럼 널리 알려진 동네나 여행책자에 나오는 시내의 이름난 헌책방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동네에서 주민들과 호흡하며 고유한 캐릭터를 갖고 있는 헌책방을 만나면 망설이지 말고 들어가 보는 것이 좋겠다.
오랜 세월동안 동네 주민들과 책방 주인의 자체 큐레이션을 거친 헌책의 바다에서 보물찾기하는 것도 여행 중 보람있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헌책 냄새가 가득한 정감있는 런던 윔블던 헌책방 나들이 이야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