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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독쌤 Jan 18. 2019

수능 31번의 비밀

수능시험, 무엇이 문제일까?

지난 15일에 있었던 수능시험에 관한 말이 많습니다. 국어영역 1등급컷이 10점 가까이 떨어지면서 '난이도 조정에 실패했다''31번이 무슨 국어영역 문제냐?'라는 문제 제기부터  '정시를 늘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식의 수능시험 자체에 대한 불만까지 터져나오고 있죠.


올해가 유독 심하긴 하지만 수능에 대한 문제의식은 늘 있어왔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수능!


오늘은 수능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수능의 탄생

수능시험은 1994년에 처음 도입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학력고사(1982~1993년)였죠. 

학력고사는 ‘고등학교 3년 통합 내신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처럼 교과의 내용을 묻는 시험인데, 시험범위가 고등학교 3년치 통째인 거죠. 이 시험의 목표는 ‘배운 내용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길러낼 수 있는 최상의 인재상은 당연히 ‘뛰어난 암기력과 성실성으로 교과 내용을 달달 잘 외우는 수용적 인재’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커녕 정보 통신 사회와도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인재상이죠.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학력고사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시험입니다.


학력고사가 ‘배운 걸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니?’를 물어보는 시험이라면, 

수능시험은 ‘네가 아는 지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니?’를 묻는 시험입니다. 


물론 수능시험 안에는 고등 교과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묻는 방법이 다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것을 아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아는 것들을 이용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있는 그대로 배울 줄 아는 인재가 아니라 생각해서 변용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인 겁니다. 그것도 선진국에서 이미 그 우수함이 입증된, 안전한 방식이죠.



국어영역 31번은 지구과학 문제?


수능 국어영역 
31번 문제는 

지구과학 문제잖아! 

 

국어영역 31번 문제는 구체와 만유인력에 관한 과학적 지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사자인 입시생은 물론이고 미디어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학력고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수능 31번은 국어영역에 출제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수능적인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문제입니다. 


대학에 가서 
공부할 학생으로서

이런 정도의 텍스트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수능 국어영역이 묻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부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대학에 가면 교양 과목 도서는 물론 대학 전공 도서, 어려운 논문까지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지식인이 갖춰야 할 제1덕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요.

수능 국어영역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입니다. 당연히 텍스트의 분야와 종류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능 국어영역에는 대화문, 설명문, 논술문, 시, 소설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지문이 등장합니다. 문학은 물론 과학, 기술, 역사, 철학,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텍스트가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니까요.



지식인의 기본 능력을 테스트하는 수능 시험

수능시험은 학력고사나 내신시험보다 훨씬 실질적인 능력을 측정합니다. 국어교과서의 내용을 잘 기억하는 것보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언어능력을 갖추는 것이 당연히 훨씬 중요하니까요.


중학생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어보면 이 시험이 얼마나 정확하게 언어능력을 측정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2주에 1권씩 책을 읽으면 6개월 평균 10점씩 수능 국어영역 점수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독서의 질이 좋은 아이들은 20점씩도 올라갑니다. 읽기능력의 단련 정도가 점수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입니다.

 

수학능력, 

학문을 수행하는 능력


학문은 언어로 수행합니다. 사고 역시 언어로 하죠. 언어능력이 높다는 것은 곧 수학능력이 높다는 것, 사고력이 높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실제로 수능시험을 주도하는 과목은 국어영역입니다. 국어영역의 점수가 높은 학생은 내신 성적에 비해 다른 영역의 점수도 상대적으로 높게 나옵니다. 국어영역 점수가 낮은 학생은 내신 성적에 비해 다른 영역의 점수도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죠. 

 

중학생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보면 실제로 수능 국어영역 점수가 충실하게 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신 영어와 수능 영어는 시험의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내신 영어는 해석을 완벽하게 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능 영어는 해석을 완벽하게 하고도 틀릴 수 있습니다. 수능 영어는 지문이 영어로 돼있는 국어시험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면서도 수능 국어영역 문제를 틀리는 것과 같은 원리로 영어를 멀쩡히 해석하고도 틀리는 거죠. 

수능 수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무슨 공식을 어떻게 대입해야 하는지부터 판단할 수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다른 영역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수능은 교과의 내용을 알기만 한다고 풀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높은 수준의 사고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수능시험은 학력고사나 내신에 비해 훨씬 우수하고 실질적인 입시제도인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수능이나 수능 31번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수능시험이 도입된 초창기에는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이 연동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어, 수학 내신이 1등급인데, 수능에서는 3,4등급이 나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죠. 학교 수업은 ‘배운 것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니?’를 묻는 방식인데, 입시는 ‘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니?’를 묻는 방식이었으니까요. 학교 수업과 입시 사이의 괴리가 점수로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죠.


어느 한쪽으로 맞춰져야 한다면 당연히 학교 수업을 ‘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니?’를 묻는 수능 방식으로 맞추는 게 시대 흐름에 맞습니다. 그런데 교육당국은 엉뚱하게도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수능시험을 학교 수업의 방식, 그러니까 ‘배운 것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니?’의 방향으로 틀어버린 것입니다. 수능 문제의 일정 퍼센트를 EBS연계 교재에서 출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수능시험은 사교육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평가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능은 본연의 성격이 약해지고 말았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수능시험이 고액 사교육을 부추기고, 교육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었죠. 이런 진단은 우리 교육 당국이 수능시험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수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으려면 실제로 사고하는 능력,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타인의 설명을 통해 학습하는 사교육의 방식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수학 문제 한 문제를 놓고 스스로 고민하고, 지식과 지식을 연결하고, 책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듭해야 올라가는 능력이죠. 수능시험은 사교육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평가 방식인 셈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수능시험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사고능력을 측정하는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수능 본연의 색깔이 옅어지고 학력고사적인 성격이 강화된 형태가 돼 버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시험 문제 중 일정 비율을 사전에 학습할 수 있는 상황에서 수능시험의 성격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방법 중 하나가 난이도를 끌어올리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바로 불수능, 국어영역 31번과 같은 고난도 문제를 낳은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교육 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사교육의 메카라는 대치동 학원가 출신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 근본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학기 저는 초등 5학년~고등 2학년 학생 300여 명을 무작위 표집해 수능 국어영역 형태의 언어능력 평가를 실시한 바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의 평균 언어능력이 초등 5~6학년 수준인 것으로 측정됐습니다. 초등 5,6학년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교육을 통해 공부한 우리 아이들은 영어를 잘하고, 수학을 잘합니다. 하지만 자기 학년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능력은 없습니다. 독서는커녕 교과서마저 스스로 읽는 게 아니라 사교육 강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해왔기 때문이죠.


학교 공부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아이들


 이것이 우리 교육의 참담한 현주소입니다.


저는 수능시험이 원래의 성격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수학 문제를 고민하고, 독서를 통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고, 사고의 힘을 길러서 그 힘으로 당당하게 겨룰 수 있어야 한다고요.

호기심의 찬 눈빛으로 책과 함께 성장하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교육 현장은 정말 불가능할까요?

<코스모스> 같은 책을, <총, 균, 쇠> 같은 책을 탐독할 수 있었던 개천의 용들,

학교 교과서 정도는 우습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 용들이 되돌아와 넘쳐나는 교육.

저는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꿈꿔야 할 교육,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혀줄 진짜 교육의 모습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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