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계급, 그리고 자아 회복의 이야기
공부가 안 되는 이유는 단지 머리가 나빠서, 태생이 본디 글러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원래 안 돼. 도저히 못해"
과연 그럴까? 물론, 재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공부를 하는게 수월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규정할 수 없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재능이 절대적으로 우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현재는 잘 못하더라도 더 좋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허름한 행색을 한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어" 그러자 유방은 분기탱천하며 일갈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그 후 그는 40대 중후반에 봉기에 참여하고 7년 만에 중국 최초의 대제국 '한(漢)'을 세운 황제가 됐다. 요즘 같아도 나이 50이면 체력이 부치는데, 기원전 200년 50세에 가까운 하급 관리출신이 봉기에 참여하고 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어 통치한다?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어떤 이들은 본성적으로 노예 기질을 타고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그 주장은 개인을 넘어 민족 차원에서 이뤄졌고 본성적으로 우월한 그리스인이 기개가 부족하고 본성적으로 열등한 아시아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본래 이 책은 도시국가(polis)의 구성, 다양한 정치 체제, 정의로운 공동체의 조건 등을 다루는 게 목적이다.
1. 국가의 기원과 인간 본성
-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
- 가족 → 지역 공동체 → 국가
- 노예제의 정당화
2. 국가의 목적은 '선한 삶'
- 국가는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도록 선하고 덕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어야 함
- 공동체를 위한 결정을 하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
3. 정치 체제 분류
4. 최선의 정치체
5. 교육과 시민의 역할
이런 책인데, 국가의 통치체제를 다루다 보니,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관계를 정당화 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당시로서 공동체의 안정과 유지 존속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설명이었으리라.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시민들의 윤리 의식은 높아졌고 그 누구도 억울하게 부당한 착취를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이들을 노예의 본성을 타고났다고 보았다.
- 이성, 지적 능력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자
- 육체 노동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한 자
-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보다 타인의 지시 아래 사는 것을 택하는 자
그 당시에는 이런 설명이 적합하게 받아들여졌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설명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이성, 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었다는 것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그를 멋대로 부려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적합해 잘 한다면, 남들은 약해서 하지 못하는 노동을 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할 일이지 그를 천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타인의 지시 아래 사는 것을 택한 것도 조직과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대표자라면, 대표자에게 잘 협조하고 조직 협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있는 팔로워, 중간 관리자로 인정되어야지 노예로 간주되어선 안된다.
노예의 본성이 아니라 사람마다 기질에 대한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기질들이 당시 시대적 한계로 인해 심각하게 왜곡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기질상, 겸손하고, 자신을 낮출줄 알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협조를 구하거나 부탁을 하고, 윗사람에 대해서는 충성하고, 현실적인 한계로 당장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감내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질과 지혜를 비굴하고, 빌어먹기 좋아하고, 굴종을 원하고, 어느 정도의 부당함을 스스로 잘 납득하는 "노예의 본성"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의의 오류이다.
안타깝게도, 본성적 노예론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인 듯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살면서 경험한 폭력, 학대, 적절할 때에 위로 받지 못함, 상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둠, 방치, 방임 등으로 자신의 좋은 기질들을 적절하게 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가진 유순함, 충성됨, 용납할 줄 아는 여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미련함·집착함·우유부단·낮은 자존감으로 왜곡시켜 스스로를 바라보고 학습된 무기력으로 항상 스스로를 다그친다.
까불지마... 그러다 다쳐... 그냥 살어
그들의 왜곡된 자아상이 치유되고 회복되길 바란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나 아는 전설적인 철학의 권위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마저도 시대적 한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누구도 노예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노예처럼 살고 있다면 그들은 노예의 본성을 타고난 게 아니라 안타까운 이유로 잠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난, 학대에 노출된 환경으로 인해 상층민이 받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 장승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순 싸움질로 보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아이큐도 낮았다. 이후 막노동으로 공사현장을 전전하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중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서 5년 만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서 사법고시를 패스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 제목이 머리가 좋아서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로 이해했는데 이는 오해이다. 막노동을 하다가 공부를 하니까 공부가 쉬웠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시의 그는 전형적인 노예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할줄 아는 것은 난폭한 싸움질과 누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막노동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후 재교육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했고 아이큐도 올랐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 중 하나인 사법고시를 패스했다. 그는 성장 환경 때문에 노예의 본성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물론, 누구나 그와 같이 성공적인 변화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고 그처럼 변화에 성공하지 못한 이를 나무랄 수 없다. 그처럼 서울대를 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스스로의 상태를 깨닫고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 문명은 우월하게 보았고 아시아 문명은 열등하게 보았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 균, 쇠』를 통해 '문명'과 같은 낱말이나 '문명의 발흥' 따위의 구절들은 은연중에 문명이란 좋은 것이고, 수렵 채집민의 부족 사회는 비참하고, 결국 지난 13,000년의 역사는 인류의 더 큰 행복을 향한 진보 과정이었다는 식의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미국의 도시와 뉴기니의 촌락에서 각각 살아본 그는 산업화된 국가가 수렵 채집민 부족보다 '낫다'든지, 수렵 채집민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철 중심의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진보'라든지, 또 그와 같은 변화가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켰다든지 하는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명의 축복이라는 것에 장단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렵 채집민과 비교할 때 현대화된 산업 국가의 국민들은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남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적으며 평균 수명이 더 긴 데 반해 교우 관계나 대가족 등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뒷받침은 훨씬 적은 편이다.
(3) 시대 환경에 따른 기회의 차이가 존재한다.
남들보다 밥을 많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부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옛날 같았으면 "식충이, 밥버러지, 돼지 새끼"등 혐오표현을 듣고 노예적 삶을 살게 됐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기술발달로 인한 먹을거리의 풍족함, 간편한 방송장비의 보급, 개인 방송 플랫폼 시대가 도래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을 먹는 "먹방"을 펼치는 이들이 주목받고 각광받기에 이르게 됐다.
(4) 각자의 시간이 다르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아바타, 타이타닉, 터미네이터 등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대작을 만든 제임스 카메론 감독. 무명 시절 그는 트럭 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특수효과 보조로 일하며 영화계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터미네이터》 각본을 단돈 1달러에 넘겼다. 대신 그가 감독을 맡기로 했다. 이 때가 성공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자굴지심(自屈之心)을 가져선 안 된다. 강하고 담대하자. 현재의 형편이 보잘 것 없다고 하여 꿈을 꾸지 않는 것은 개인에게 안 좋은 일임은 물론이고 나중에 도움을 끼칠 세상에도 악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유한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비하하거나 학대하기 위해 본성적 노예론을 주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 통치 구조에 대해 살펴보니, 빈약한 생산체제와 낮은 기술력으로 인해 생산력을 감당하려면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를 정당화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논리적 설명을 덧붙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주장을 제한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건 부인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이제 그 주장이 가지는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부당하게 지배 될 수 없고 부당하게 지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에게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 기여의 정도에 균형이 깨질 때는 부당하다고 한다. 그 균형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서로 조화롭게 기여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 조화로움이 공동체에 만연하게 될 때 비로소 공동체는 지속가능한 선을 발현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건 유방이니까, 장승수니까, 제임스 카메론이니까 가능했던 거고, 나는 안 돼. 그리고 너도? 안 돼.” 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전할 때 주변에서 핀잔을 들었다.
"네가?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너는 고작 트럭 운전이나 하잖아. 하급 관리 주제에, 막노동꾼 주제에"
하지만 그런 거짓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신이 처한 상태가 당신을 결정 짓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를, 그리고 당신을 결정짓는 건 오로지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결심하자.
나는... 노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