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고해에 놓인 기쁨
친구가 선물해 준 칼랑코에가 꽃이 시들어 메말라 보기 흉했는데 한동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는 초록이들 물을 뿌려주며 혼잣말을 했다
"예뻤는데..."
"엄마, 꽃이 시들었다고 그냥 버리는 거 아니라던데?"
"그런가? 뿌리는 살아 있는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포동 포동한 초록 이파리 사이에 자그만 몽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 몽우리를 보는 순간 기뻤다.
기쁨은 생이라는 고해에 놓인 징검다리라고 한다.
여기까지 오게 했던 기쁨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뜻밖에 마중을 나와 줬을 때,
첫아이가 엄마라고 불렀을 때, 걸었을 때,
주택에서만 전전긍긍 살다가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곳에 이사 갔을 때,
아이들이 교외에서 상품과 상장을 받았을 때,
회사에서 아이들 학습관리 잘하여 상을 받았을 때.등이다.
글쓰기 또한 나에게 기쁨이다
글을 쓰며 몰랐던 트라우마를 무의식에서 끌어올리며 뺨에 흐르는 눈물은 고요한 포옹이 된다.
그 눈물은 상흔을 안아주는 위로와 기쁨이 된다.
그런 기쁨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이었다.
어제는 신발이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자아의 억압으로 의식을 차단해 버려 글을 쓰기 못하시고 오후에 올리겠다는 분이 계셨다.
무의식에서 끌어올린 트라우마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의 신발이었다.
친정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제부가 가지고 왔던 어머니의 신발이 담긴 검정 봉지를 당시엔 두려움으로 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글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글쓰기가 아니였으면 자아의 억압으로 알지 못했던 트라우마였다.
나를 알지 못하고는 타인을 공감하지 못한다.
나의 감정을 알아 차리는 일이 중요하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아는 일이 그림자를 대면하는 일이고 그렇게 그림자에게 말을 거는 일이 카를 융은 무의식에 가까이 가는 일이라고 했다.
개성화(자기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개성화가 되었을때 창의적인 삶을 살아 갈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