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재수학원 복도에서 휴대폰을 귀에 바싹 대고 온몸을 수그린 채 우는 여학생을 본 적이 있다. 우리끼리는 척 보면 척인 그런 장면들이 있다.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 아팠고, 어떤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고시촌에 양손 가득 책을 이고지고 다니는 수험생들은 내게 갑남을녀가 아니었다.
바람이 살짝 떠밀어도 울리는 나의 소리가 있었다.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퍼져가는 그 동심원에 닿은 이들이 또 몸을 흔들며 존재의 공명을 울려줬고,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웅- 웅- 하며 순간마다 맺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일을 하면서, 인연에 낡아가면서 작은 공명이 들리지 않게 된 건 내 소리가 사라진 데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플레이되는 매 순간이 내게 들리지 않는다는 건 돌아보건대 참 낭만이 없는 삶이다.
집에 오는 길에 어느 작은 아파트 담벼락에서 꽃을 봤다. 오래 잊고 지낸 모양의 꽃이다. 방울꽃도 아니겠고 둥글레라기엔 조금 크기도 하고. 아무도 허리숙여 보지 않는 구석에 수그리고 앉아 동심원을 울리고 있는 꽃이 새삼 고마웠다. 톡 하면 뭐라도 떨굴 것 같던 시절. 흔들 흔들 부유하던 시절. 뿌리는 약해도 딴엔 꽃이라 불리던 시절이다. 그리워하는 걸로 성에 안 차서- 여름 밤 무드를 빌려 다시 좀 누려봐야겠다.
응답하라 웅-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