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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Jerk Aug 09. 2018

인연의 힘은 있는 걸까

기억 서랍 속 여인들

#1 비

"집이 어디니?"

여고 교복 입은, 키가 나보다 한 뼘은 웃자란 누나가 집을 물었다.  

강동원이 우산에 뛰어드는 장면처럼

젖은 내 머리 위를 덮어가는 그녀의 우산이 슬로모션이었다.

저렇게 다정 가식 가득한 문장은 아니었고,

너 집이 어디야, 정도의 평문이었을 텐데

의도가 다정해서 나는 저렇게 기억한다.

"...ㅁㅁ 아파트요."

"근처까지 씌워다 줄게. 어쩌다 우산도 없이."

"..."


같이 걷는 십몇분 동안 학교는 어딘지, 몇 반인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숫기 없는 중딩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대답만 주워섬겼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나를 내려준 뒤 누나는 명랑하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때는 가는 뒷모습을 볼 것도 쑥스러워 엘레베이터까지 곧장 걸었다.


얼굴도 교복도 우산 색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보송보송했던 날로 기억한다.

종종 그 일이 생각 나면 그 길을 걷는 동안 뭐든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그랬던 거니까.



#2 손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과 놀 땐 나름 입을 걸게 놀리던 열여덟 살.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주말이면 교회를 나루터 배처럼 착실히 오갔다.

연애의 메카라는 데를 다니면서도 남중-남고의 DNA를 정통으로 맞아 숫기 없이 지냈다.


얼굴 맞대고 남녀가 둘러 앉는 여름수련회는 기대감과 부끄러움이 주변 공기를 후텁하게 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는 죄의식도 늘 함께.


수련회 마지막 밤에는 포크댄스를 추곤 했다. (요즘은 안 하는 것 같다)

알아서 적극적인 요즘 학생들에겐 시시한 행사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쫄보 남학생에게 그것은 설레고 부담된 순서일 수밖에 없었겠다.


커다란 모닥불이 이글이글 나를 응시하는 여름 밤 가운데 남녀가 손을 교대로 쥐어가며 스텝을 밟는 일은

얼마나 서툴고 또 거칠겠나.

새벽의 모기와 하루살이처럼 은밀하고 절박한 심정이다.

누가 앞에서 목 아프게 소란을 정리하고, 회장의 농담에 폭소가 터져도 사춘기 소심한 남자애한테는 고요한 긴장 뿐이다.

더욱이 소녀들이 모닥불을 등지고 서서 표정과 얼굴도 볼 수 없다면 더더욱.


그렇게 차례가 계속 돌아 가다가 어느 손이 내 손을 과감하게 휘감았다.

그건 손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샤벳 같고,

크림 같고,

노래 같고,

노을 같은 손.

아득한 맨드라움이 내 손을 떠나가기 전에

황망함을 못 참고 한 마디 했다.

"손이... 정말 부드러워요."

"......"

그 걸던 입으로 참 착한 말을 했다.

내 인생에서 사심을 담았던 첫 문장이다.

별 대꾸 없이 그 손은 내 옆 보이에게 떠났다.


나는 그 다음에도 몇 소녀들의 손을 더 쥐고 춤췄고, 그 이후 10년이 넘게 몇 아가씨들의 손을 더 만져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만큼 섬세하게 누군가의 손을 감지한 적은 없는 것 같다.



#3 잠

C대학 경영학과 02학번으로 입학했을 때,

운 좋게 예비번호 문 닫고 들어간 티를 내느라 학업에 태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길에서 주운 돈을 누가 아껴 쓰나. 별 힘 들이지 않고 들어갔으니 별 힘 들이지 않고 다녔다.


당시 경영학원론은 지정석이라 자리가 비면 무조건 결석 처리시키는 수업이었다.

수업이 싫은 학생들이 울상으로 출석하거나 울상으로 대타를 구했다.

나는 첨부터 정신이 바짝 들었는데,

운 좋게도 내 옆자리 여학생이

귀염상에 글래머였고 이쁘면서 글래머였는데 조숙하고 글래머였으며 정숙한데 글래머였기 때문이다.

어리숙할수록 눈이 섬세하지 못하니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복잡하게 판단할 안목도 안 되던 시기고 아무튼 그녀는 글래머였다.


나에게 출석할 이유가 생겼다.

그치만 친해지는 수완이 없으니 꾸벅 꾸벅 인사만 잘 할 뿐이었다.

친구들도 부러워하며 그녀에 대해 몇 번을 물었는데, 내가 진전도 없이 뭉개는 통에 금새 흥미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쩌다 펜을 빌리고 받거니, 과제를 묻고 답하거니 하면서

학식도 같이 먹고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남친이 이미 있다는 것과 경영학과를 복수전공으로 듣는 영문과 3학년 이라는 것. 영문 모르게도 누나는 얼빠진 신입생을 잘 대해 주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였다.


그 첫 학기를 마친 뒤에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남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유쾌하고 정답게 지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끔씩 화제가 될 때마다 조금 굳은 얼굴로 연애가 비슷하지 뭐, 란 식이었다.

나는 당시 모쏠이라 연애끼리는 뭐가 비슷한지도 이해를 못 했지만(;;;).


당시 난 수원에서 학교까지 꽤 먼 거리를 통학했는데 뭐만 탔다 하면 조는 성격이라 속편하게 매일 5시간을 통학에 날리고 있었다.

그날도 기차에서 졸던 중이었는데,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누나였다.

잠기운때문에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폰 번호를 바꿨다면서 주말에 밥 한 번 먹자, 하고 약속을 잡자는 대략의 기억이 있다. 아쉽게도 약속은 무산됐다. 나의 주말 아르바이트 때문이었을 것이다.

뭔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에 누나가 묘하게 여운을 끌다가 통화를 끊었는데,

나는 빛의 속도로 다시 잠에 들어 버려서 내린 뒤엔 통화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몇 주가 지난 뒤에, 갑자기 그 통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누나한테 연락해봐야지, 하다가 번호를 바꿨다던 말이 떠올랐다.

다급하게 통화 목록을 뒤져보았지만

스피드011 시절이라 30개 통화 기록 외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싸이월드 계정도 몰랐고, 누나의 이름도 너무 흔한 이름이었다.

너무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

공강 시간에 인문대 근처를 기웃려보기도 했고,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 물어볼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러는 너님은 누구신데요, 라고 새눈 뜨고 물으면 뭐라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차마 하지 못했다.


한 번만 더 연락이 오길.

문자 하나만이라도 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 뒤로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쩜 그 연락이 딱 그렇게 마지막이었을까.



나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렇게 되어버린 인연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타이밍>이라거나, 그 순간의 <컨디션>이라거나, 나의 <용기>, 무심코 나오는 <말 한 마디>라거나

그런 걸로 빚어지는 운명, 우연, 인연의 묘한 힘을 생각하게 되곤 한다.


그 엇갈림 조차도 어쩌면 아슬아슬함이 아니라 실은 너무나 분명하게 어긋날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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