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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저널리즘 Dec 03. 2018

100명의 관객, 100개의 이야기

#81 《SLEEP NO MORE》 전윤경 저자

안녕하세요, 북저널리즘 에디터 곽민해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연말을 실감하시나요? 백화점의 트리 장식을 보거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을 들으면 ‘올해가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연을 즐겨 보신다면 티켓팅으로 연말 준비를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평소 보기 힘든 기획 공연이 쏟아지는 시기니까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슬립노모어(SLEEP NO MORE)〉라는 작품입니다. 슬립노모어는 공연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 있는 대신 호텔로 꾸며진 극장 안을 돌아다닐 수 있고, 배우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거나 방에 있는 소품을 만질 수도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슬립노모어는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미국 뉴욕과 중국의 상하이로 진출했습니다. 관객들이 이 새로운 공연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SLEEP NO MORE》의 전윤경 저자는 “슬립노모어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뉴욕에서 슬립노모어를 보는 꿈은 내년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이번 겨울 뉴욕행을 준비하고 계시다면 슬립노모어를 꼭 보시고 후기를 들려주세요. 여러분의 기억이 다른 관객의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 Yaniv Schulman for The McKittrick Hotel


슬립노모어는 무대가 따로 없는 공연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공연을 보나?

보통 공연에서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다. 슬립노모어의 관객은 공연장 전체를 활보하고, 배우와 함께 공연의 일원이 된다. 공연장은 호텔로 꾸며진 6층 규모의 극장이다. 100개의 호텔 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관객은 러닝 타임 동안 여러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래서 관객이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보고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다면 줄거리는 어떻게 이해하나?

슬립노모어에는 정해진 줄거리가 없다. 작품의 원작이 된 《맥베스》나 《레베카》를 아는 사람은 해석하기가 조금 쉬울 수 있겠지만, 몰라도 괜찮다. 공연을 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모든 관객이 연출가의 의도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고정 관념이 아닐까. 이 공연을 파티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배우가 떠난 자리에서 혼자 춤을 추는 관객도 있다. 일반적인 공연처럼 서사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면 즐기기가 어렵다. 

무대와 객석이 없고, 줄거리도 없다. 새로운 방식에 낯설어 하는 관객이 있을 법도 한데.

친절한 공연은 아니다. 슬립노모어에서 관객이 배우를 만나려면 입장부터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핸드폰 등의 소지품을 맡기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이동해야 하고, 안내자의 호명을 받아야 본격적인 공연에 참여할 수 있다. 가면도 써야 하고, 다른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된다. 가면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처음에는 시야가 좁아서 잔뜩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게임에 익숙한 세대를 타깃으로 해서인지 거부감은 적다. 슬립노모어를 보는 느낌은 게임 속의 세계를 직접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공연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발레가 무용의 정석이라 불렸을 때, 현대 무용은 평단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공연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편견과 싸우며 확장해 왔다. 이제 공연은 서로 다른 장르가 뒤섞이는 실험의 장이다. 무용과 연극이 뒤섞이고, 가상현실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된다. 장르의 개념도 확장되고 있다. 슬립노모어는 관객이 극장을 산책한다는 의미에서 프로미네이드(promenade) 연극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장소의 의미를 살린다는 점에서 장소 특정 공연이라고도 한다. 이런 형태를 통칭해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이라 부른다. 공연이 관객을 에워싼다는 뜻이다.


요즘은 모든 공연이 체험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예술 영역에서 이런 경향이 시작된 시점이 언제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성행한 1990년대부터다. 관객이 예술을 통해 미학적 경험을 추구하는 시대가 열렸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도 맞물려 있다. 사람들은 이제 공연을 보러 가지 않는다. 영화관에 직접 가지 않아도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영화를 볼 수 있고, 멀티미디어 기기를 통해 다채로운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공연계만의 변화가 아니다. 공공 미술도 관객의 참여를 통해 그 의미가 완성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많은 분야에서 관객 경험을 강조하고 있지만, 슬립노모어의 관객 경험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일까?

슬립노모어 공연에는 관객 참여를 강조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특징이 있다. 개인성과 특수성, 차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참여 예술이나 공공 미술이 보편성과 공공성을 중요시한다면, 슬립노모어는 모든 관객이 고유의 경험을 가지고 극장을 나서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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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는 여기까지만 공개합니다.



전윤경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 학부 교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공연, 영화, 애니메이션 등 문화 콘텐츠 기획과 스토리텔링을 강의한다. 논문 〈동시대 공연에 나타나는 관객 참여 방식 연구 - 런던 펀치드렁크 극단의 슬립노모어를 중심으로〉를 집필했다. 인문콘텐츠학회 이사로, 한국영상문화학회, 공연문화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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