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천재 작가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읽었다.
물레방아는 4장으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단편소설이다.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내려다보니 3류 애로영화, 치정 영화로 밖에 만들지 못했는지, 아니면 감독이 작가가 쓰려고 한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지 못해서인지 ‘물레방아’란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하다.
나도향의 이 소설을 극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칭하면 어떨까 한다.
일단 4 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육중한 물레방아
2. 나가라는 통보
3. 돈과 본능적 잔인성
4. 출옥
작가가 각 장의 제목을 지을 때 천재적인 감각으로 지었던, 고심해서 지었던, 독자로 하여금 감당케 하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육중한 물레방아라니... 물레방아는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되고 그 사건의 무게로 보아 육중하다는 표현이 절묘하다.
이 마을 최고의 부자이며 세력가인 신치규의 집에 막실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이방원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탐욕스러운 신치규는 방원의 계집을 취하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그 계략은 아무도 모르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방원의 계집에게 이미 일러주고 꾸미는 것이다. 이미 계집과 집주인 신치규는 물레방아 간에서 거사를 치른다.
2 장에서는 신치규가 하루아침에 방원에게 나가라는 통보를 한다.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나고 소작 붙일 땅까지 잃어버린 방원에게 계집은 물질적인 풍요를 한탄하며 방원을 비난하다 크게 두드려 맞는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방원은 이것이 다 계집과 신치규의 계락임을 모른 채 다만 서러움과 안타까움을 계집에게 표현한 것이다.
3 장에서는 돈과 본능적 잔인성이라는 아주 적나라한 제목을 붙여 놓았다. 아내를 찾던 방원이 방앗간에서 아내와 신치규를 발견하고 분노에 치를 떤다.
‘그는 한참이나 사지를 떨었다. 두 이가 서로 맞춰서 달그락달그락하여졌다. 그의 주먹은 부서질 것같이 단단히 쥐어졌었다.’
그의 팔, 그의 온몸에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극도에 달하자 사람의 가슴속에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잔인성이 조금도 남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신치규를 폭행한 방원은 주재소로 끌려가고, 이후 상처를 치료한 신치규는 아무 일 없는 듯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4 장 출옥에서는 감옥을 나온 방원이 자신의 계집을 찾아왔다 이미 변심한 계집의 뻔뻔함에 계집을 죽이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절명하는 것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를 마친다.
방원의 계집은 누구의 꼬심을 당한 것도 아니고, 굶어 죽을 것 같은 고난을 겪은 것도 아닌데, 방원을 배신한다. 은가락지 등 물질적인 풍요를 원해서였다. 그리고 사실 이 배신이 처음도 아니다. 방원 또한 다른 남자의 계집이었던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던 것이다.
신치규는 계락으로 방원을 내쫓고 방원의 계집을 차지하지만 일말의 후회나 반성도 없고 당연하다는 태도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세상이다.
방원도 분한 마음에 폭행하여 감옥에 간 것으로도 부족해서 다시 돌아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이 또한 작가가 바라본 현실을 너무나도 꾸밈없이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물레방아 간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었다.
본능적 잔인성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는 방원에게서 뿐만 아니라, 방원을 철저히 배신하고 돌아선 방원의 계집에게서도, 방원을 계락으로 쫓아낸 신치규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허무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결코 치정에 방점을 두어서는 안 될,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급격히 벌어진 빈부의 격차와, 그 시대에 모럴을 잃은 우리 사회를 아프게 바라본 작가의 일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