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 연재 소설 - 전교 1등 선정이의 비밀
“어릴 때부터 오빠와 나의 미래는 ‘의사’로 결정돼 있었어. 의사인 친할아버지, 아빠처럼, 대대로 의사 가문을 이루는 것. 다른 꿈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의대 진학 레이스는 초등 저학년 때 시작이야. 아니다, 태교 때부터 주술처럼 엄마는 생각했대. 딸이든 아들이든, 의사만 되게 해달라고. 사육당한 인생. 오빠가 수능 만점으로 한국대 의대에 합격한 거 보면 그래도 효과가 있긴 해.”
서일고 4년 선배이기도 한 선정이 오빠 주선민은 화양구에 떠도는 에피소드를 묶으면 책 한 권 출간도 어렵지 않을 듯한 ‘공부의 신’이었다. 수학 문제집을 눈으로만 풀고 책 읽듯 휙휙 넘긴다거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토익 만점을 받은 영어 실력, 중고등학교 과학 토론대회를 싹쓸이한 과학 영재, 수준급 피아노 실력까지. 그를 가르친 공교육, 사교육 선생님들은 인성과 실력을 모두 갖춘 완벽한 사기캐로 그를 찬양했다.
“하긴 니네 오빠가 화양구 레전드로 남은 인물이라...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겠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이야기하지, 오빠가 미친 듯이 갈아 넣은 시간은 알지 못하니까…. 오빠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린 감옥 속에 살았어. 이젠 탈출했으니 오빤 그 시간을 다 잊었을까? 난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선정이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테스트 인생’이라고 정의했다. 처음 기억하는 것은 다섯 살 영어 말하기 대회. 네 살 때부터 이미 영어 에세이 쓰기를 시키는 프랜차이즈 영어 학원에서 전국 원생들을 서울 강남의 큰 무대에 세우는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객석 맨 앞자리에서 기도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엄마의 긴장된 표정. 엄마가 왜 그렇게 오빠와 자신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선정이 부모님은 같은 병원 전공의와 간호사로 만나 시댁의 엄청난 반대 끝에 결혼했다. 손주들을 의사로 키울 자신이 없으면 언제든 짐을 싸서 나가도 좋다는 시부모님의 압박에 선정이 어머니는 보란 듯이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시댁에서 받은 모멸과 상처를 갚을 길은 그 방법 외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민이 오빠나 선정이가 큰 대회에서 수상한 날은 집 안에 웃음꽃이 피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코스 요리를 먹곤 했다.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모습, 친지들의 칭찬과 부러움 같은 것이 어린 선정이에겐 다음 미션에 도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고력 수학 경시대회, 수학 국제 올림피아드... 해가 바뀔수록 테스트의 난도는 올라갔고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났다.
오빠 주선민은 달랐다. 부모님이 원하는 모든 미션을 완벽하게 통과하는 것이 고통의 프레임에서 탈출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선정이에게 오빠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높은 벽이 되어 있었다. 실패할수록 싸늘했던 아침 식탁의 공기, 당연히 너도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선정이 오빠가 수능 만점을 맞아 한국대 의대에 입학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하자 그때부터 집 안의 모든 관심은 선정이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헐. 드라마 <스카이캐슬> 현실판이네. 압박감 장난 없다. 전교 1등이란 후광 때문에 난 니가 늘 완벽해 보였어.‘
“완벽해 보이도록 세팅된 거지. 대외적으로 그럭저럭 통했던 셈이고……. 내가 준비했던 영재교에 탈락하자 아빠의 집착은 완전 선을 넘기 시작했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 선정이 아버지는 서점에서 직접 고른 수학 문제집을 한가득 사 왔다. 대치동 1타 수학 강사의 학원 과제와 선정이 오빠가 소개한 한국대 의대생의 수학 과외, 거기에 아빠가 내준 문제집까지 다 풀기 위해 선정이는 하루 5시간이던 수면시간을 4시간으로 줄였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정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믿음 가정의학과‘ CCTV 관리 업체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며 집 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다. 선정이가 과제를 밀리거나 방 안에서 좋아하는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 날 저녁엔 질책인지 추궁인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비난이 쏟아졌다. 선정이 스마트폰에 깔린 청소년 보호 어플을 통해 하루 동선이 체크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선정이는 디지털 감옥에 결박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1, 첫 중간고사에서 선정이는 수학 과목 전교 3등을 했다. 다른 과목과의 합산을 통해 전교 1등이 되었지만, 학사관리 앱 <리로 스쿨>에 성적이 게시된 날, 선정이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은 재활용 업체 트럭이 와서 전부 싣고 가버렸다. 선정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사 모은 책이라고 했다. 북 콘서트에 참여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직접 받은 친필 사인이 담긴 책, 중고 서점에서 찾아낸 한정판 도서도 꽤 많았다. 그날 학원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한 선정이는 텅 빈 책장을 보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공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된다는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선정이는 생각했다. 오빠의 생각이 옳다, 이 감시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대에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먹고, 마시고, 숨을 쉬어도 텅 빈 느낌이었어. 그냥 나는 사이보그처럼 입력된 값대로 결과를 내놓으면 되는구나. 그게 가정의 평화구나.. 그래도 11월 16일, 수능이 끝나면 해방일 줄 알았는데...삶은 감옥이야. 박제된 감옥….”
박제?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선정이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툭….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의 둑이 터져버린 것처럼 선정이는 한동안 그렇게 눈물만 흘렸다. 사서쌤 테이블의 티슈를 얼른 가져다 선정이에게 건넸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하지? 적당한 말을 고르는 중에 선정이가 먼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어떤 기분인지,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어.
“답답한 일 있으면 누구한테든 말해. 그래야 덜 힘들어….”
“앞으론 은호 너한테 말할게. 넌 사이버 보안학과 가는 게 목표지. 디도스 공격, 서버 다운, 신상털기.... 뉴스에 나오는 그런 일, 맘 먹으면 할 수 있는 거야? 상두 여러 번 탔다며?”
“코로나 시기에 온라인 해커대회가 자주 열려 운이 좋아 상을 타긴 했는데, 이 바닥에 워낙 미친 천재들이 많아. 디도스 공격 같은 블랙해커 뉴스를 자주 보니까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이고. 나는 화이트 해커가 될거야. 블랙해커의 공격을 차단하는 보안프로그램을 만드는 일.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는 보이지 않은 암호나 코드 같은 것들이 숨어있거든. 그 암호를 풀 수도, 아무도 열지 못하게 잠글 수도 있어야 보안 전문가가 되는 거야. 창과 방패의 싸움이랄까?.”
“암호 해독가 같은 일이네. 아무도 열수도, 잠글 수도 없게 만드는 것….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은호 너만의 비밀의 방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 나도 그런 방이 필요해.”
“그런 방이 있으면 뭘 하고 싶은데?”
“완벽한 휴식 아닐까? 은호야, 앞으로도 내 얘기 좀 들어줘. 진짜 친구처럼.”
스터디 카페에 가야 한다며 2시쯤 선정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먹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여기 온 것이라, 스터디 카페 입실 알림 문자가 늦어지면 아빠에게 전화가 올 수도 있다면서. 진짜 친구? 지금까지 우린 어떤 사이였을까 생각하는 사이, 도서관 통창 너머 어느새 교정 산책로를 걸어가는 선정이의 모습이 보였다. 패딩 모자를 꾹 눌러쓰고 웅크린 채 걸어가는 선정이의 뒷모습은 초등학생처럼 작고 가냘파 보였다. 미세먼지로 온통 회색빛인 하늘, 바람이 꽤나 부는지 운동장에는 흙먼지가 일었다. 그 바람 속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는 뒷모습....그것이 내가 본 선정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