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 연재 소설 -선정이의 죽음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또 누군가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카멜레온 같은 시간의 결. 단 한 번 미세한 초침의 움직임 사이에, 하늘 꼭대기에서 땅끝으로의 추락도 아무렇지 않게 감춰둘 수 있는 시간의 완벽한 침묵. 그 날, 우리의 저녁이 행복했던 이유는 누군가 제물이 되어 잔인한 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아버지까지 합세해 지훈이가 준비한 음식으로 저녁을 같이 먹었다. 매콤한 오징어 섞어 찌개에 삼겹살 수육. 유난히 손맛이 좋은 지훈이는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만으로 뚝딱뚝딱 한 상을 금방 차려내곤 했다. 대입을 접고 고3 개학과 함께 직업 위탁 학교에서 요리를 배우기로 결정한 지훈이가 당분간 최후의 만찬이라며 마련한 자리였다. 아버지는 지훈이가 차린 음식을 드실 때면 대박을 연발하면서 지훈이를 ’짱세프‘라고 추켜세웠다.
”야, 매콤하니 속이 확 풀어지네. 새벽에 소주 반병 마시고 잤더니 하루 종일 속이 부대꼈는데. 역시 장지훈, 짱셰프 대박이야! 수육도 아주 살살 녹네~. “
”아버님, 편의점 새벽 알바 좀 쓰세요. 그러다 몸 상하세요.“
아버지가 정말 걱정되는 듯, 지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요샌 진득하게 일하는 알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지혜처럼 붙박이로 커버해주는 친구가 드물지. 요즘 애들 말이 편의점 새벽 시간은 극한 알바라나, 뭐라나. 최저 시급도 너무 올라서 내가 몸빵 할 수밖에 없어. 지훈아, 너두 밤길 운전 항상 조심해라.”
“이제 개학하면 요리 실습하고 자격증 따느라 야간 배달 많이 못 해요. 주말에 편의점 봐 드릴 테니 그때라도 푹 주무세요. 불쌍한 고 3 은호, 넌 공부 열심히 하고 ㅋㅋㅋ”
장난 섞인 미소를 지을 때 왼쪽 뺨에만 보조개가 들어가는, 환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지훈이. 언제부터인가 지훈이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4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허전해진 빈자리를 넉살 좋고 유연한 성격의 녀석이 훌륭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PC방 죽돌이 시절에 친해진 지훈이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재고 따지기보다 일단 닥치고 해보자는 마인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늘 머릿속이 복잡한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 처음부터 녀석에게 끌렸다.
지훈이는 3개월 전에 보육원을 나와 독립했다. 화양구에서 자립 준비 청년들의 독립을 위해 무상으로 오피스텔을 단기간 제공하는데, 지훈이도 대상자가 되어 6평 오피스텔을 1년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 독립의 기쁨을 만끽할 줄 알았더니, 지훈이는 오피스텔보다 우리 집을 더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이다. 이젠 나 없이도 부자지간처럼 꿍짝이 잘 맞는 두 사람, 그래서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가끔 심술 같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주 꿀 떨어지네요. 아빠는 지훈이 오는 날은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영 잠을 못 주무신다고~ 영구 추방해야 한다면서요?“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 흠흠….“
갑작스런 나의 폭로에 당황하며 얼버무리는 아버지를 보며 지훈이와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징어 섞어찌개 국물을 원샷으로 한사발 들이키고 아버지가 말했다.
”은호야, 깜박했는데 친구가 왔다 갔다. 여학생인데 이름이 뭐랬더라.... 같은 동아리라면서 편지를 두고 갔는데, 가지고 올라온다는 걸 깜박했네, 혹시 여친이냐?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치며 아버지가 물었지만, 낮시간 마주했던 선정이의 모습이 스치며 뭔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전할 말이 있다면 카톡이나 메시지를 이용하면 될 텐데, 생뚱맞게 편지라니.....
”혹시 단발머리예요?“
”응.. 그 레옹에 나오는 여주처럼 칼 단발에 아주 얼굴이 하얗던데. 예쁘더라.“
”아, 선정이 말씀하시는 거네. 걔 며칠 전에두 왔다 갔어. 너, 해커로 활동한 지 오래됐나 묻더라. 대박! 아버지 그 친구 우리 학교 전교 1등이거든요. 오~ 진짜 은호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러브 레터 같은데!“
“언제 왔다 갔어요?”
“1시간 좀 더 됐을걸.”
”저 좀 내려갔다 올게요. 편지 어디다 두셨어요?“
”카운터 밑에 서랍 안에 뒀지.“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창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와 냉장실에 진열 중이던 지혜 누나가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카운터 안쪽 서랍을 열었다. <친구, 은호에게> 하얀색 봉투에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쓴 선정이의 글씨. ’친구’라는 단어가 훅 커지더니, 머리를 한 대 후려치는 것 같았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다... 서둘러 편지 봉투를 열었다. 하얀색 A4 용지에 쓰인 선정이의 짧은 편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파우스트>의 결말은 틀렸어.
메피스토보다 영혼의 거래를 한 파우스트가 더 사악한데 왜 구원을 받았을까?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레트헨의 모든 것을 앗아간 파우스트.
나는 그놈과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거야.
은호야, 약속한 것처럼 내 얘기를 들어 줘.
그리고 나를 지워 줘.
부탁해.
군데군데 선정이의 눈물 자국으로 번져 있는 글씨들...덜덜...나도 모르게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 봉투 안에는 칼로 반듯하게 잘라낸 파우스트의 결말 부분, 두 장이 함께 들어있었다. 카운터 위로 편지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꺼내 선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두 차례 발신음과 함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잔인하도록 무감각한 기계음.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 생각도 못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혼이 반쯤 나간듯한 나의 모습에 아버지와 지훈이가 동시에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큰일 났어…. 선정이 찾아야 돼!“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선정이가 다닌다는 학교 앞 <브레인 스터디 카페> 쪽으로 지훈이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화양구 메인도로 세이브몰 사거리를 막 지날 때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 한 대가 지훈이 오토바이와 가까워지더니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해 나갔다. 화양구의 밤하늘을 잠시간 굉음으로 가득 채운 사이렌 소리는 긴 꼬리표를 물고 멀어져 갔지만, 쿵! 돌덩이처럼 마음에 내려앉은 그 무엇! 환청 같은 사이렌 소리가 어머니가 떠나간 그 날처럼, 사방에서 나를 포위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훈이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헬멧을 벗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카톡,카톡,카톡! 학급과 동아리 단톡방을 비롯해 SNS의 알림음이 일시에 봉인 해제된 것처럼 정신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헉, 우리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대!-
-경찰차 뜨고 구급차 오고 이 시간 난리 남-
-투신이라는데, 진짜임??-
제발...30분만, 아니 단 10분 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일상’ 속에 은밀하게 잠복하다, 방심한 사이 검은 아가리를 열어 통째로 삶을 집어삼키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침묵하는 시간의 폭력성. 선정이를 앗아간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