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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May 01. 2024

1화- 제로데이 공격

프롤로그

‘제로데이 공격’은 사이버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패치가 나오기 전, 시차를 이용해 해커들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제로데이 공격’의 핵심이듯. 고통에 대한 면역 따위가 생기기 전에, ‘보통의 날’이라 믿었던 일상을 보기 좋게 전복시켜 고통을 극대화하는 것. 부숴버리고 마는 것.....

우리 삶의 ‘제로데이 공격’은 어느 시간 틈 사이에 숨겨진 것인지 결코 찾을 수 없어 어쩌면 사이버 세상의 그것보다 더 치밀하고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국내외 해킹 방어대회, 버그바운티 대회에 참가해 괜찮은 수상 경력이 있는 고등학생 해커 차은호, 나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고3 개학을 열흘 앞둔, 23년 2월 20일 월요일 밤에 선정이가 죽었다. 그리고 내 삶에 제로데이 공격이 시작되었다.       


   


1화. 제로데이 공격

오전 6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익숙한 게임 음향에 눈을 떴다. 무단 침입자 지훈이 녀석. 작년 여름방학 군에 입대하는 친한 형에게 오토바이를 물려받자마자 배민 신참 라이더에 합류한 지훈이는 막 배달 장소가 우리 집이랑 가까울 경우 예고도 없이 찾아와 소파를 차지하곤 했다. 요즘 지훈이의 잠자리 B.G.M은 게임 유튜버 페이커의 롤플레이 영상. 중학교 시절, 경기도 화양구에서 닉네임 ‘동방박사’로 꽤나 이름을 날리던 플레이어 시절이 그리운 건지, 녀석의 취향은 참 한결같다. 한편으론 답 없는 입시판과 확실한 선 긋기에 나선 녀석의 결단이 부럽기도 하다.     


아침 식탁엔 항상 아빠가 준비한 풀코스 만찬?이 대기 중이다. 어떤 메뉴가 깜짝 등장할 것인지는, 자비로운 고객님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오늘 아침은 병아리콩 샐러드와 바나나 한 개, 참치 샌드위치, 그리고 흰 우유. 아..3일째 참치 샌드위치라니. 좀 물리긴 하지만, 일주일 내내 ‘화끈 치즈 불닭 삼각김밥’을 먹었던 악몽의 작년 3월을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정체불명 화끈한 소스 범벅 삼각김밥을 먹고 나면 아침부터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편의점 새벽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귀가라고 표현하기도 뭐한 것이 1층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투게더 편의점, 3층 빌라가 우리 집이다. 여하튼 편의점에서 아버지가 챙겨오시는, 고객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폐기 식품들이 나의 아침이다. 최대한 재고를 남기지 않는 것이 난립하는 편의점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아버지의 강력한 신념! 반항하지 않는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프로그램 버그처럼 짜증 나는 메뉴를 먹을 때는 간단한 묵상으로 ‘단종’의 주문을 걸어본다. 우주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화끈 치즈 불닭 삼각 김밥은 지난 여름 단종되었다.     

식탁 의자에 걸려있는, 투게더 편의점 비닐봉지 속의 삼각김밥은 지훈이 것으로 남겨두고 학교로 향했다. 겨울방학 동안 야간에는 라이더로, 낮에는 아버지 편의점에서 알바 중인 지훈이가 썩 좋아할 메뉴는 아니지만.



개학이 코 앞이지만, 학교는 아직도 박제된 시간 속에 머무르는 것처럼 정지된 느낌이었다. 경기도 화양구에 위치한 서일고등학교. 코로나 19 대유행과 함께 지난 2년간 대면, 비대면 수업이 반복되며 학교는 생기를 잃었다. 실내 마스크 해제와 함께 대부분 일상은 회복된 것 같았지만, 겨울방학 내내 학교는 모든 것이 멈춘 듯 텅 비어있었다.



8시 10분, 구관 6층에 자리한 교내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고2까지 1.9의 내신. K대 사이버 보안학과 도전을 위해선 어떻게든 고 3 내신을 끌어올려야 한다. 지난밤에 끙끙대다 덮어버린 현우진 쌤의 ‘뉴런’을 다시 펼쳤다. 무려 스탠포드 수학과 출신의 인재가 화끈하게 인생을 걸어도 충분한 대한민국 입시판. 메가스터디 주가를 쥐락펴락하는 그의 2022년 재계약 금은 무려 200억이라고 한다. 현우진 쌤 외에도 수십억 원 매출이 일상인 대치동 1타 강사들이 대한민국 입시 판의 진정한 승자 아닐까? 젠장.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무니 문제가 제대로 풀릴 리가.....1년이 멀다 하고 전형을 요리조리 손보는, ‘변태 컨셉’에 최적화된 수능판은 빨리 뜨는 것이 승자다. 킬러 문항을 몇 개 더 풀고 탭으로 미적분파트 인강을 연달아 듣기 시작했다.      

<현우진의 뉴런>, 강의명 자체가 명품스럽다. 신경계 단위로, 자극을 받아 다른 세포에 정보를 전달하는 뉴런. 방학이 끝날 때까지 뉴런을 완강하면 현우진쌤의 위대한 수학적 사고가 내 머리에 다운로드 되는 건가? 잡생각이 또다시 꼬리를 물기 시작한 1시 반쯤, 블랙 패딩 점퍼 지퍼를 마스크 가까이 올리고 점퍼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선정이가 유리문을 밀며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복도의 찬 공기가 갑자기 실내로 밀려들자 온몸의 세포들이 일순간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눈인사를 나눴다. 교내 ‘북태그’ 동아리 멤버이긴 해도 선정이와 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다. 북태그 동아리는 한 달에 두 번, 도서관 봉사 활동과 ‘북태그 챌린지’를 함께 했다. 동아리 회원이 읽은 책의 인상적인 문장을 북태그 단톡방에 공유하고, 그 책을 동아리 내 다른 회원이 릴레이로 함께 읽으면 5천 원 도서 상품권이 양쪽에 선물로 전달되었다. 북태그 카톡방에 올라오는 문장들은 습관적으로 ♥를 누르지만, 선정이가 공유한 문장은 유독 공감되는 것이 많았다.


왠지 예전보다 얼굴이 더 하얗고 핼쑥해 보이는 선정이가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삼선 슬리퍼에 스타킹도 신지 않은 선정이의 맨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패딩으로 최대한 온몸을 감싼 것과는 달리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진 종아리는 오랫동안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시려 보였다.      

1학년 때부터 의대 진학 목표가 확실했던 선정이는 항상 빈틈없이 일관된 모습이었다. 단정한 똑 단발, 잔주름 없이 잘 손질된 교복 블라우스와 치마, 총명함이 느껴지는 두 눈, 항상 꽉 다문 입술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전교 1등의 포스가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 선정이 모습은 어딘가 다르다. 서가에서 꺼내온 두툼한 블랙 커버의 <파우스트>를 테이블에 올려두면서 선정이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스카 갔다가 가끔 책 빌리러 도서관에 오면 항상 은호 니가 있더라.”

“이제 정신 차리고 고3 인척 해보는 중이지, 뭐. 야, 근데 이렇게 두꺼운 벽돌 책 읽을 시간이 있어?

“이해하고 싶어서 수십 번 읽어봤어. 자기를 엄청난 지식인이라 착각하고 악마와 놀아난 파우스트가 천국에 간다는 결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돼서. 한때는 작가가 꿈이었는데, 괴테가 60년을 바쳐 이런 허접한 결론에 도달한 걸 보면..일찌감치 포기하길 잘한 일이야.”

“넌, 의대 목표 아니었어?”

“꿈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이지..나에게 놓인 모든 현실의 합이 가리키는.......”     


나를 보고 있지만, 허공 어딘가에 닿은 듯 초점을 잃은 선정이의 두 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은 시간까지 멈춰선 듯 ‘무색무취’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선정이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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