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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diary jenny Aug 04. 2021

[픽션 3]술에 대한 술 취한 술꾼K 이야기

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마시는가.



 

술을 마신다.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다.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신다. 마음이 슬퍼진다.
마음이 슬프다. 술을 마신다.

 

“올 한 해 술 소비량은.....” ‘뭐야, 저런 게 기사거리라니. 도대체 저런 건 누가 조사하며, 저딴 걸 조사해서 뭐한단 말야? 그럼, 내가 올 해 마신 술은 얼만큼이게?’ 피식 웃음이 난다. 그때 갑자기 든 엉뚱한 생각, ‘음, 사람들은 무슨 술을 마실 때 가장 구질구질해질까? 아, 더 이상 구질구질해 질 수가 없는데, 더 구질구질해지고 싶은 이 구질구질한 마음은 뭐지.’  


 

소주, 맥주, 와인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술이라면 당연히 소주다. ‘야! 내가 가난해서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란다. 구질구질한 인간들과 구질구질한 인생을 알아가기 위해 소주를 마시는거라고. 알겠냐?’ 오늘따라 더 구질구질 더러워 보이는 천장을 쳐다보며 씩 웃는다. 기분이 좋다. ‘어우씨, 이 기분 좋은 찰나에 왜 또 그 인간이 생각나는건데.’  


 

이러한 이유로 술을 마시고, 저러한 이유로 술을 마셔야하며, 그러한 이유로 오늘도 술을 마셨을 오랜 인연의 선배가 있다. 그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언제나 합당하다. 왜냐, 항상 합당하게 말을 하니까 합당한 것이다. 이유는 항상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오, 그렇네. 안 마실 수가 없네.’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장 달려가 술을 대령해야 될 것 같다. ‘뭐야, 오늘도 또 이 인간 술주정에 제대로 납득당한건가?’

 


어느 날 오후, 오랜만에 그 술사랑 선배와 통화를 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넘어, 스스로 봐도 말도 못하게 나빠졌단다. 가급적 적당히 마신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한다. ‘와, 믿기지도 않는 말을 저렇게 진지하게 하다니. 대단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젠 일주일에 세 번으로 횟수를 줄였단다. ‘야, 인간아. 그게 적은 거냐?’ 기가 찬다. 몇 년 째 되풀이하는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 문을 박차고 나온 얘기를 또 들었다. 지겹도록 들은 얘기다. ‘어후, 인생 참 버겁게 사네.’ 마음이 짠해온다.  



4년 전, G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다. 온통 술꾼들이 버글버글한 책이었다. ‘어우씨, 어째 책에서 소주 향기가 나는거야?’ 꺼림칙한 마음에 책을 펼쳤다. 그때 갑자기 술만 마시면 자주 보이는 술사랑 선배의 습관성 눈 부라림이 번뜩 떠올랐다. 그의 부담스럽지만 우스꽝스러운 눈 굴림이 자꾸 생각나서 짜증이 폭발했다. ‘에잇, 이거나 읽자.’

 


책에는 열 명의 굵직한 술꾼이 등장했다. 조연까지 합치면 술꾼이 스무 명 되려나. 다들 각양각색 모습으로 나름 합당한 이유를 들이대며 마구 퍼마신다. 찌그러진 표정으로 무지개 색 색연필을 하나씩 뽑아서는 이번만은 동심어린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그런 장면들이 괜히 짜증났다. 무지개 색을 다 섞으면 결국 시커먼 색이 되듯, 그들의 삶은 예상한대로 껌껌하고 칙칙하다. ‘에혀, 답답한 인생.’



"... 훈아, 훈아! 규가 외쳤다. 주란하고 얘기할 필요없어. 난 말해. 너의 이런 씨발, 같이 술 먹다가 훌쩍, 이런 너의 무신경이, 너무너무 싫다고. 싫어 죽겠다고. 알지, 이거 취한 거. 주란이 말했다. 훈은 스트레이트로 양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아는데 이 녀석이 아까부터 자꾸 나를 힘들게 하네. 훈이 너 이 새끼, 같이 술 처먹다가, 그게 뭐하는 짓이냐고. 그러면 같이 술 처먹던 난 뭐가 되냐고....”


 

구질구질한 관계에서 여행을 떠난 세 명의 남녀가 말 그대로 구질구질한 싸구려 이유들로 신경전을 벌인다.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를 어긋난 문제들이 가득하다. 답답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딱 봐도 적나라하게 보인다. 진실을 외면하려고 술을 찾고, 술을 매개로 필사적으로 자기방어를 한다. 단순한 술주정이 아닐 때도 있다. 인생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선명하게 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 참, 장한 커플이다, 우리.” “맞아, 당신 참 장해. 오래 버텼어. 다녀와라.” 영경의 젖은 눈에 퍼뜩 생기가 돌았다. “정말 괜찮겠어?” “난 괜찮아.” 영경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정말 안 나가겠다는 말은 못하겠어, 환아.” “그래, 다녀오라니까. 너무 오래 있지만 말고.” “오래 안 있어. 사흘, 아니 이틀. 환아, 그 정도면 충분해. 이틀만 있다 들어올게. 딱 두 밤 자고 들어올게, 환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아껴준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그들의 뺨을 후려 갈긴다. 유일하게 남은 조그만 불씨마저 꺼버리다니. 알코올성 치매인 영경이 아픈 수환을 병원에 두고 술을 마시러 간다. 술을 마시는 외출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약속하며 병원을 나선다. 그것이 끝이었던가. 영경은 자기가 취한 건지, 세상이 취한 건지 도저히 구분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그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널브러진 술병들과 멀쩡한 정신과 함께.

 


옳지 못한 건강과 장시간의 능력 부재로 친자포기각서를 쓰게 되었다는 선배의 최근 소식을 친구를 통해 들었다. 그의 무절제와 무능력을 봤을 때는 당연한 결과였다. ‘어이그, 어디서 또 술 퍼마시고 있겠구만.’ 한숨이 나왔다. 하긴 술이 아니면 선배의 구질구질한 인생은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잊고 싶은 것을 잊기 위해 술을 퍼마시며 아슬아슬한 하루를 구질구질하게 이어가고 있겠지.

 


이웃한 아파트에 알콜 중독 아주머니가 산다. 항상 개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데, 개들 역시 술 취한 듯 비틀거린다. 아주머니가 공원 벤치에 쓰러져 있던 작년 어느 날, 산책하는 한 아저씨와 함께 술 취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와 함께 부축해서 집 근처까지 옮겨드렸다. “아이고, 많이도 마셨네. 이 아줌마 상처가 많을거요. 이런 사람들, 상처투성이거든.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니까.” 아저씨의 그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선배도 그랬고, 아주머니도 그랬다. 외로움을 술로 달래고, 술만이 유일한 친구인 것이다.


 

우리는 술을 마신다. 이런 이유로 마시고, 저런 이유로 마시며, 그런 이유를 찾아 열심히 마신다. 오늘도 마시고, 어제도 마셨고, 이변이 없는 한 내일도 마실 것이다. 그렇게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삶이지만 휘청휘청 균형 잡으며 간신히 살아간다. 텔레비전 속 더러운 현실을 쳐다보며, 주위의 추악한 삶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며 술을 들이붓는다. ‘핫핫, 술은 거짓말 안해. 얘는 날 속이지 않는 진실 된 친구라니까.’  

 


세상은 나에게 술을 퍼먹인다. 내 온 몸과 마음을 관통한다. 구질구질해 갖다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또 너무 불쌍한 구질구질한 나를 술은 항상 위로해준다. 나는 지금 술의 언어를 찍어내는 중이다. ‘야, 세상 사람들 다 뒤져봐라. 구질구질하지 않은 인간이 어딨는지. 있냐? 있으면 나와봐. 내가 술 사준다, 우씨.



“하하, 술 중에 술은 역시 소주랍니다!”라는 글로 마무리를 하는 나는 조금 구질구질하긴 하지세상 당당한 술꾼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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