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4]길 위의 그 소년을 품으며, 나는 시인K.

시인을 꿈꾸는 K의 꾀죄죄했던 시절 가난한 추억 하나

by book diary jenny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향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 길)’


나는 K. 시인이 되고 싶은 K.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시인이 되고 싶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시를 못 쓴다. 시가 뭔지도 모른다. 그냥 좋아 보인다. 시인K라 불리고 싶다. “어이, 시인K!"라고 불리고 싶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래도 내게는 시인K의 희망이 있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정말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시를 읽는다. 김기림 시인의 길을 읽는다.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이 떠오른다. 얼굴이 희미한 모네의 아내와 그 뒤에 서 있는 아들 모습의 그림이다. 그림에 대한 사연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그 그림을 보던 날 눈물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시인K가 되었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수필 같은 이 시를 본 순간 우중충한 우산을 들고 있던 비 오던 날의 엄마가 떠올랐다. 갈색 우산에 황금색 녹이 슨 우산이다. 엄마는 내 나이 열 두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밖을 배회하며 일했다. 또 다른 가난한 이들과 짝 맞춰 일을 다녔다. 봉고차를 타고 멀리멀리 돌며 떠돌이 장사를 했다. 낡은 이불을 말끔한 이불로 개조해 주었다. 엄마는 기술이 없었다. 무거운 이불을 받아들고 건네주는 몸 쓰는 일을 했다. 기술이 없었고 몸만 있었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엄마는 더러운 그걸 깨끗한 그걸로 신분상승 시켜줬지만 정작 자신 인생은 항상 더러운 것에 머물러 있었다. 밤이 되서야 돌아오는 엄마의 신분은 항상 피곤한 것에 머물러 있었다. 이게 정말 잘못된 건 아니다. 한 번 나가면 감감무소식. 가끔 공중전화로 전화가 왔다. 장 좀 봐둘래? 잘 자거라. 청소, 설겆이, 도시락 준비, 장보기는 내 차지였다. 물론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어린 내가 거뜬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반가운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과 사갈게. 먼저 자. 침이 고인다. 고인 침이 흐른다. 고였다가 흐르는 침을 닦는다. 그 침은 그 시절 나만의 사치였다. 어느 하루는 너무나 슬펐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우울함이 터질듯 올라 왔다. 어둠이 내 뺨의 더러운 얼룩을 씻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무자비하게도 어둠은 내 뺨을 더욱 더 얼룩지게 만들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고인 침과 함께 고인 눈물이 흘렀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정지에 앉아 저녁준비로 곤로에 오뎅 반찬을 데우며 울었다. 어디 아프냐? 아뇨, 아빠. 아프지만 아프지 않아요. 그 나이 아이들이 사춘기랍시고 누리는 새침한 행동은 내겐 사치였다. 그토록 아팠다면 그건 그 나이만이 누리는 예민함이라는 가시가 내 안을 향해 찔러서다. 가시 하나에 침 하나, 가시 하나에 눈물 하나. 그렇게 침과 눈물은 쌍을 이루며 나를 다스려갔다. 이게 잘못된 건 아니다. 다음날 학교를 다녀와 엄마가 사둔 땅콩그래 과자 두 개를 먹었다. 그래, 그래. 먹고 힘내자. 땅콩도 내게 그러잖아, 그래그래라고. 사촌언니가 물려준 마이마이 카세트에 담긴 팝송을 듣는다. 적막한 사막에도 꽃은 피듯, 막막한 내 마음에도 음악은 흐른다. 워즈돈컴이지투미하우캔아이파인드어웨이유메이크유세이알러뷰워즈돈컴이지. 알러뷰라는 단어는 쉽게 오지 않는단다. 그래 쉬운 건 쉽기 때문에 그게 너무 쉬워서 쉬울 뿐이지. 알러뷰가 뭐니. 쉬운 게 뭐니. 갈색 우산이 쉬워보여서 되겠니. 사과가 쉬워보여서 침이 나지 않는다면 되겠니. 엄마는 힘겨워서 엄마였고 아빠는 괴로워서 아빠였고 나는 버거워서 나였다. 갈색 우산 같은 지붕 아래서 사과 같은 침 한 조각 삼키며 팝송 워즈 같은 눈물 한 곡을 흘리는 나는 시인K. 꾀죄죄했던 시절 가난한 추억 하나가 오늘도 나를 불러낸다. “어이, 시인K!" “네, 맞아요. 저에요. 그게 제 이름이에요.” 자기만 남겨두고 모두 가버려 아프던 김기림 시의 소년이 보인다. 그 소년의 갈색 우산과 사과 한 조각과 노래 한 소절이 둥둥 떠다닌다. 난 침을 삼키고 눈물을 머금는다. 갖다버린 갈색 우산과 던져버린 사과 조각과 더 이상 듣지 않는 팝송을 꼭꼭 묻어둔다. 그때의 소년도 그때의 나도 잘못은 없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 정말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었든 그 소년은 나에게 그 소년이며, 나는 이제 어엿한 시인K다. “어이, 시인K!"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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