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10] 새벽공주K는 정말 아름다워

새벽을 타고 올라올라 올라가는 새벽공주K 이야기.

by book diary jenny


아, 새벽 공기가 정말 달콤하다. 미세한 숨소리만이 가득한 이 새벽은 나의 소박한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밤새 자르르 흐른 곱디고운 별빛 가루가 고루고루 흩뿌려져 있는 새벽 이 시간. 조금 있으면 활짝 펼쳐질 아침이라는 공간을 위해 아주 잠깐 머무는 새벽 이 시간. 이 소중한 순간을 혼자 조용조용 가만가만 보내는 나는 새벽공주 K다. 공주. 이런, 공주라니. 누군가에게는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새벽공주라는 이 닉네임이 눈물이 날 만큼 내 마음에 쏙 든다. 나에게 다가온 여러 공주들의 이미지는 가슴 뛰는 설렘을 선사해 주었다. 일단 공주들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아주 길다. 공주들은 윤이 나는 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하다. 공주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소만 지긋이 짓고 있으면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공주의 그런 이미지에 대한 거부반응에 살짝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주라는 이 가슴 절절한 단어를 여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주는 나의 반짝반짝 빛나는 희망사항이다.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에게 부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나를 공주라고 불러줘요. 떨리는 음성으로 부탁하는 나에게 순간 당황하던 그들이 떠오른다. 기꺼이 하하하 웃으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공주라 불러준 이도 있었다. 정신 이상한 여자를 만난 것 같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떨어져 나간 이도 있었다. 그런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공주라는 걸 짜릿짜릿하게 좋아한다. 공주는 공주니까. 파아란 새벽을 좋아하는 나는 새벽공주 K다. 고운 모래 결 같은 새벽은 수정 구슬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오묘하다. 설렌다. 흥분된다. 무시무시하다. 시간에 대한 물리적인 상식 등 딱딱한 과학적 사실은 싫다.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이야기 등의 미신적인 뭔가도 딱 싫다. 새벽이라는 시간이 그냥 너무 좋아서, 술에 진탕 취한 듯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다. 새벽은 왜 이렇게 좋고도 좋을까. 다들 쿨쿨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신이 난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뭔가 좀 특별하다. 영차영차 일을 하든, 하아하아 연애를 하든, 타닥타닥 게임을 하든, 어후어후 괴로운 고민을 하든 특별하다. 나? 새벽공주 K인 나 역시 영롱하게 특별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새벽공주이기 때문이다. 새벽공주의 새벽시간을 고개 갸우뚱하며 궁금해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이건 앙증맞은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정말 솔직한 이야기다. 그게 뭐냐면, 공주라고 해서 항상 공주처럼 화려하게 부풀려진 옷을 입고 있진 않다는 것과 공주라고 해서 항상 공주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행동을 하고 있진 않다는 것이다. 음, 비밀 누설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뜨겁게 화끈거리고 몸이 오들오들 떨리지만 괜찮다. 나는 공주니까. 공주는 공주니까. 그런데 이토록 어여쁜 새벽공주인 나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새벽시간에 먹는 이슬은 나에게 맑디맑은 물보다도 소중한데. 새벽시간에 마시는 이 공기는 나에게 하얀 쌀밥보다도 소중한데. 새벽시간에 듣는 이 고요는 나에게 그 어떤 천상의 음악보다도 소중한데.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물 머금은 솜처럼 힘겨워지고 있다. 나는 새벽공주 K다. 새벽을 사랑하는 공주다. 그런 내가 요즘 바윗덩이 같은 고민이 있는 것이다. 새벽만 되면 너무 슬퍼진다. 산뜻한 분홍빛 드레스가 이제는 내 몸에 너무 크다. 찰랑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이제는 내 머리에 너무 무겁다. 또각또각 금빛 구두가 이제는 내 발에 너무 딱딱하다. 달디달았던 새벽이슬이 이제는 입에 너무 쓰다. 새벽 공기가 너무 바스락거린다. 아, 왜 이런 걸까. 나는 새벽공주인데. 새벽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깊고도 오묘한 이 새벽에게 무릎을 꿇어버렸다. 내가 새벽을 이토록 사랑하고 존경한 만큼 새벽 역시 나를 쓰다듬으며 돌봐주고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이런 진지한 나에게 회색빛 위기감이 검푸르게 다가오고 있다. 언젠가부터 입지 못하는 산뜻한 분홍빛 드레스, 이제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찰랑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 내던진 지 오래된 또각또각 금빛 구두. 언젠가부터 먹지 못하는 달디 단 새벽이슬, 언젠가부터 마시지 못하는 새벽 공기. 그리고 또, 또, 또. 내가 좋아하던 어여쁜 공주들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백설같이 하얀 피부의 공주, 한 줌 늘씬한 허리의 공주, 호랑이 같은 용감함이 아름다운 공주, 작은 크기가 앙증맞아 사랑스러운 공주, 이런 공주 저런 공주 모든 공주들. 그녀들이 오로라 빛 화려하게 퍼지듯 저 하늘 높이 위로위로위로 마구마구마구 떠올라간다. 공주들의 드레스는 화려하고 공주들의 머리카락은 풍성하고 공주들의 발은 곱디곱다. 새벽을 향유하는 나는, 다들 알다시피 새벽공주 K. 나도 공주니까 저 공주들처럼 하늘 위를 당연히 날 수 있다. 지금 당장 저 파아란 하늘 위를 날 수 있다. 희뿌연 구름들을 두 팔로 휘휘 내저으며 두 발로 휙휙 걷어내며 신나게 날 수 있다. 나는 새벽공주니까 그럴 자격도 충분하다. 무릎까지 꿇어버린 새벽이기에 나는 그럴 수 있다. 나는 새벽공주니까. 그래, 우울해 하지말자. 슬퍼하지도 말자. 새벽공주로 산 나는 새벽공주 K. 내가 아리따운 공주로 살아온 이 긴 시간 동안 진심으로 좋았더랬다. 공주는 나의 꿈이었고, 공주는 나의 희망이었고, 공주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새벽을 사랑했기에 새벽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그래서 이제는 새벽의 품에 안겨있다. 새벽공주 K라는 닉네임이 정말 마음에 든다. 누런 호스로 들어오는 저 쓰디쓴 약은 내가 지금껏 먹었던 새벽이슬이다. 딱딱한 인공호흡기로 들어오는 저 탁한 연기는 내가 지금껏 마셨던 새벽 공기다. 뻣뻣한 느낌으로 몸에 닿는 이 환자복은 지금껏 입었던 분홍빛 드레스다. 시원하게 없애버려 서늘해진 이 민머리를 감싸는 두꺼운 털모자는 지금껏 손질했던 풍성한 머리카락이다. 굳어버린 딱딱한 발끝은 더 이상 감각이 없다. 아, 혹시라도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런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싶다. 공주로 산지 80년이 된 지금, 나는 80살의 새벽공주 K다. 공주 나이가 왜 80이냐고? 아,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80살의 새벽공주인데, 이를 참. 그토록 되고 싶던 공주, 그래서 되어버렸던 공주, 새벽을 사랑해 새벽공주가 되었고, 그래서 새벽공주 K로 80년을 살았던 나. 나이가 지긋해진 80살의 나. 진짜 새벽공주가 될 준비는 이제 끝났다. 새벽에게 무릎을 꿇었고, 새벽은 그런 나에게 새벽 한편을 건네주었고, 그런 새벽의 품 안에 나는 이제 완전히 안기게 된다. 마침 지금도 새벽. 새벽공주는 이렇게 마지막도 새벽으로 끝이 나는 법. 공주 이야기 가득한 아름다운 동화처럼 환상적이고 황홀하고 또 위대하다. 나는 새벽공주, 80살의 새벽공주 K. 새벽을 타고 올라갈 나는 80살의 새벽공주 K다.


(제주도 가는 하늘 길 구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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