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두꺼운 외투를 벗는다. 굽이 낡은 갈색 부츠는 이미 벗었다. 검고 두꺼운 외투를 벗으니 이제 살 것 같다. “말도 마라. 얼마나 나를 무시하던지. 너 걔가 나를 평소에 무시하는 거 알지? 시어머니인 나한테도 그런데 형님인 너에게는 오죽하겠니. 세상 모자란 것 모르고 자라서 싸가지가 없어, 애가. 내가 끝까지 이 결혼을 반대했어야 했는데. 끝에 흔들려가지고 반대를 못했더니. 봐라,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잖니. 너는 왜 그때 끝까지 반대를 안 했어? 그렇게 마음 좋게 웃기만 하니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뒤흔드는 거 아니냐. 야단쳐. 소리도 좀 지르고. 고약하고 얄미운 것. 좀 피곤하면 죽겠다는 기색을 다 내질 않나. 자기만 아프냐? 다음 동창 모임에 나가면 부끄러운 걸 무릅쓰고라도 이번 있었던 일을 친구들한테 말해서 걔 꼬락서니에 대해 한 번 물어봐야겠다. 내가 진짜 억울하고 섭섭하고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나중에 더 늙으면 날 얼마나 구박하겠니. 너는 또 어떻게 할 거냐. 진짜 큰일이다, 큰일. 큰애 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응?”
색이 바랜 철 지난 블라우스를 벗는다. 검고 두꺼운 외투는 이미 벗었다. 색이 바랜 철 지난 블라우스를 벗으니 이제 살 것 같다. “말도 마. 얼마나 나를 무시하는지. 연애할 때는 그렇게 난리도 아니더니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니까. 자기 하나 믿고 이 낯선 곳에 와서 생활하는데, 나를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몰라. 어제는 술 마시면서 이러는 거 있지. 애가 없으니까 동료들하고 할 말이 없다고. 아니, 그게 나 때문이니? 솔직히 애라도 생겨봐, 어쩔 거니. 지가 돈을 잘 벌어, 능력이 좋아. 애 타령하고 앉아있네.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나 때문에 애가 없다고 한숨 쉬는 꼴이라니. 처마시는 술이 아깝다니까. 나 진짜 같이 못 살겠어. 진짜 큰일이다, 큰일. 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응?”
어정쩡한 길이의 치마를 벗는다. 색이 바랜 철 지난 블라우스는 이미 벗었다. 어정쩡한 길이의 치마를 벗으니 이제 살 것 같다. “말도 마요, 언니. 저 여자가 얼마나 나를 무시하는지. 저 진짜 저 여자 때문에 회사 못 다니겠어요. 그 프로젝트 엄청 까다로웠잖아요. 같이 할 사람이 없으니까 나를 끼워 넣어서 같이 하더니, 실컷 다하고 나니 자기가 혼자 다 한 것처럼 떠벌리고 다녔더라고요. 나를 자기 직원 부리듯이 그렇게 개고생 시켜놓고선 내 이름은 올리지도 않고요. 진짜 나쁜 년이에요. 저런 기회주의자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니 소름 돋아요.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 여자, 사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언니도 알죠? 그렇게 꼬리를 치더니. 저 어느 날 회사에서 보이지 않으면 저 여자 꼴 보기 싫어서 그만둔 줄 아세요. 저 나쁜 년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입병이 또 도졌다니까요. 진짜 큰일이에요, 큰일. 언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네?”
보풀이 생긴 흐느적거리는 스타킹을 벗는다. 어정쩡한 길이의 치마는 이미 벗었다. 보풀이 생긴 흐느적거리는 스타킹을 벗으니 이제 살 것 같다.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본다. “말도 마요, 적막강산 님. 능구렁이 같은 지도교수가 날 무시한다고 제가 저번에 그랬죠? 저 오늘 선배 같지도 않은 박사 것들 앞에서 바보 취급당했잖아요. 교수라는 것들 다 싸가지도 없고 재수 없어요. 어우, 씨발. 진짜 짜증 나요. 지가 모르는 걸 나에게 덮어 씌우 질 않나. 지가 찾아야 될 자료를 왜 나에게 다 시키냐고. 더 짜증 나는 건요, 나한테만 시킨다는 거예요. 나도 바쁘다고요. 님, 제가 얼마나 바쁜 인생을 사는지 잘 아시죠? 아르바이트 뛰고 나면 엄마 식당 가서 일 도와드려야 하지, 과외 가야 하지. 공부가 사치라는 것도 당연히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취업할 데가 없는데. 님도 잘 아시잖아요, 세상이 더럽게 힘들다는 거. 제가 게을러 빠져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미래가 없어요. 나 어떡하면 좋죠. 진짜 큰일이에요, 큰일. 적막강산 님,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네?”
아직 온기가 남은 허름해진 브래지어를 벗는다. 보풀이 생긴 흐느적거리는 스타킹은 이미 벗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허름해진 브래지어를 벗으니 이제 살 것 같다. “말도 마십시오.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당도 가만히 있진 않겠습니다. 마이크 저리 치우세요. 장난하는 겁니까? 야, 너 어디 기자야? 아이씨, 기사 제대로 써. 어디 건방지게 까불고 있어. 저리 비켜요.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건 국민을 위한 겁니다. 저는 국민을 존경합니다. 잘 아시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자리에 저는 있지도 않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한 것 밖에 없는데, 저는 억울합니다. 나라 꼬락서니를 보니 진짜 큰일이에요, 큰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십시오, 네?”
동굴 같은 이불속으로 조심조심 기어 들어간다. 귀찮아 개지 않았던 두껍고 무거운 이불이 다행히 나를 푹 감싸준다. 귀가 한숨을 쉰다. 귀가 먹먹하다. 귀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해본다. 다행히 귀는 아주 잘 붙어있다. 이제야 입도 벌려본다. 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다행히 말도 잘 나오는 것 같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두껍고 무거운 이불속은 고요하고 잔잔하고 차분하다. 이제 살 것 같다. 적막강산 같은 동굴 속, 이제야 마침내 귀는 닫히고 입은 열린다. 굽이 낡은 갈색 부츠와 검고 두꺼운 외투와 색이 바랜 철 지난 블라우스와 어정쩡한 길이의 치마와 보풀이 생긴 흐느적거리는 스타킹과 아직 온기가 남은 허름해진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고 동굴 같은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잠이 든다. '적막강산 K'라는 닉네임이 너무나도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