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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diary jenny Sep 25. 2021

생각 양식 49 - 아버지가 쓰신 동화책

배고픈 이가 배고픈 이를 아껴주는 소중한 마음




어릴 적 부모님이 쌀장사와 분식점을 함께 하신 적이 있다. 여러 가지를 하셨지만 그중 그나마 잘 된 게 그것이었다. 단칸방에 딸린 조그만 가게에 여러 잡곡과 쌀을 조금씩 놔두고 되로 파는 쌀가게였다. 그 앞에 튀어나온 갑판대에서 핫도그, 오뎅 그리고 고기만두와 납작 만두를 파셨다.



낮에는 주로 쌀을 팔고 해 지면 분식점에 주력하셨는데, 이른바 투잡을 하셨던 것이다. 가난이 이유였다. 가난이 아니라면 그토록 고생할 이유는 없다. 작은 규모였지만 두 분은 항상 분주하셨다. 꼬치에 오뎅을 끼우고, 핫도그 반죽도 만들고, 만두를 적당한 불에 굽고, 간간이 쌀도 팔아야 하는 등 일이 손에서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휴일이라는 건 그들 삶에 없었다. 나 역시 그런 걸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의 엄마는 삶에 단단한 모습이기보다는 어설픈 순진한 모습이셨다. 어여쁜 얼굴과 고운 머릿결을 기억한다. 질끈 묶은 어깨 길이의 머리에 손으로 짠 진분홍 낡은 스웨터, 발목까지 오는 남색 털 장화도 기억난다. 자기 전 손등에 바르는 안티푸라민의 향도 내 코끝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 겨울이면 발꿈치가 항상 갈라져서 바셀린을 줄기차게 바르셨다.



단칸방 우리 집 쪽은 바람이 엄청 셌다. 얼마나 추웠던지 천장에는 얇은 얼음이 깔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 쥐들은 신나게 천장 위를 지나다녔으니, 자다가 듣는 다다닥 쥐들 경주 소리는 오히려 자장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어린 마이클 잭슨이 구성지게 부르던 ‘벤(Ben)’은 나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 큰 위안이 되었다.



Ben, the two of us need look no more.

We both found what we were looking for.

With the friend to call my own

I'll never be alone

And you my friend will see

You've got a friend indeed.



중요한 건 이 일이다. 훗날 아버지가 옛날 일을 떠올리시며 이야기해주셨는데 그 당시 한 남자가 우리 가판대에 가끔 왔다. 평상시와 다르게 며칠 동안 그는 고개를 푹 숙이는 등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더란다. 왜 저러나 싶을 만큼 티가 났다. 그러더니 만두를 담아둔 봉지 두 개를 빼앗듯이 잡아채고는 쌩 도망을 가버렸다고 한다. 가판대가 워낙 좁아 몸을 빼기 힘든 구조였기에 아버지는 그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건, 그러고도 두 번 정도 더 훔치고 달아났다는 것. 당연히 CCTV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었기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번번이 놓치셨지만 마음 좋은 아버지는 그 사람이 가져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일 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늦게 쌀 배달을 다녀오는 엄마와 그 도망치던 남자가 정면으로 딱 마주치게 되었다. 쌀을 세 되 이상만 사더라도 배달을 해주었는데, 단골 확보를 위한 엄마만의 작전이었다. 쌀을 팔고 신나는 마음으로 돌아오던 엄마와 마주친 그 남자라니, 그는 운이 없었나 보다.



아버지가 그를 찬찬히 보시니, 어이없게도 어른이 아닌 소년티를 갓 벗은 10대 후반의 남자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연을 들으셨다. 공장 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그랬다는 것. 10대 나이에 일을 한다는 건 학교도 못 다니고 평범한 학생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거라고 판단되셨나 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버지 젊은 시절 자체가 그 남자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부터 온갖 궂은일을 하셨고, 엄마를 만나 결혼할 때 당시 말 그대로 수저만 준비된 상황이셨다.



아버지가 그 남자에게 다음날 다시 오라고 약속을 하셨단다. 대신 꼭 와야 한다고. 다음날 아버지는 고기만두 세 세트와 핫도그 다섯 개를 미리 준비해 두셨다. 저녁 내내 그 남자를 기다리셨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가 다시는 오지 않으려나 싶어서 애가 타셨다고. 섭섭했었다는 말씀이 마치 어린 시절 아버지 본인에게 건네는 말 같아서 나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가판대 앞을 쓱 지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셨다. 그도 이쪽을 힐끗 보았다는데, 그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있었단다. 아버지가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부르려던 순간, ‘혹시 여자 친구인가?’ 싶어서 망설이셨다. ‘여자 친구가 맞다면, 내가 이렇게 음식을 싸서 주는 모습을 보이게 될 텐데, 그러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



그러고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도 분식점을 접으셨다. 그 남자가 지나가더라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 걔가 10대 후반이었으니, 이제는 50대가 넘었겠다.” 아, 50대의 그 남자라니. 나도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실지 궁금하다. 그분은 이 일을 기억하고 계실까.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도둑질을 당연히 혼내셨어야죠.’라는 마음이 컸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고 또 애틋했을지 알 것 같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이가 또 다른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다는 것, 배고픈 이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 이런 게 아름답지 않다면 이 세상 어느 이야기가 아름다울까.



우리 아버지만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살던 달동네에는 이런 따스함이 가득했다. 여름밤이면 공동화장실 부근 공터에 장판을 펴고 과일을 나누어 드셨다. 겨울이면 누구네 집에 모여 담요를 덮고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꾀죄죄했던 우리들은 마냥 즐겁고 신났다. 별사탕 하나에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밤 깎는 아주머니, 엄마처럼 홀치기(천에 무늬를 새기는 작업) 하는 아주머니, 레이스 실밥 잘라내는 언니들, 그리고 내 머리를 땋아주며 예뻐해 주던 다방 언니들도 그립다.



사랑과 축복, 기쁨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자기 가족 안에서만 돌고 돈다면 그것들의 영롱한 가치가 너무나도 아깝다. 좀 더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그 빛이 마구 새어나가 널리 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스한 마음을 넘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도 가질 수 있다면 더 최고겠지.



아버지의 이 미담은 적어도 나에게는 최고의 동화책이다. 이제는 일흔 중반이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남기며, 조금이라도 더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따스한 내가 되기를 희망한다. 날이 쌀쌀해져 오는 만큼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따스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나에게 존재하는 사람에 대한 조그만 온정은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이다.



(우리 동네 또 다른 '서로 안아주는 나무' 모습.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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