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마음 Nov 28. 2022

나는 디지털 기록자로 밥벌이하며 산다


빠름과 느림의 중간에서



디지털이라는 신기술은 우리에게 참 많은 편리함을 안겨다 주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어디에서도 손쉽게 단어의 조각들을 모을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의 나만의 단어 창고가 된 것이다. 이제 플랫폼도 다양해서 활용할 능력만 된다면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에 들어가서 빠르게 퍼트릴 수 있다. 그래도 아날로그 세대인 나는 가끔은 종이의 질감,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여전히 그립다. 그 옛날 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삐삐 시절에 누군가의 메시지를 기다리던 공중전화박스, 내 방 침대 한구석의 장면이 떠오른다. 느렸지만 간절함은 더 깊었던... 내 몸은 어느덧 빠름에 익숙해 있지만 느림도 잊지 않고 있다.


빠름과 느림의 충돌이 가끔 이어진다. 빠름에 익숙해지더라도 때론 내 몸과 정서가 그것을 거부하려는 순간이 온다. 입안에 돌기가 생기거나, 다이어리가 빼곡한 일정으로 채워지거나, 심지어 주말에도 평일과 똑같은 일상으로 살아가거나, 불필요한 말로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거나 할 때 말이다. 이런 사인이 오면 잠시 멈추어야 한다.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내 일상과 이제는 떼어낼 수 없는 디지털 기계와도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몸에 귀 기울이고, 정서를 보듬어야 한다.






디지털 공간은 나를 찾게 해 준 감사한 존재다.



나는 디지털 기록자다. 내 정체성을 한 가지 말하라고 하면 말이다. 디지털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책을 꾸준히 읽어왔지만 글은 쓰지 않았다. 쓰더라도 이 노트 저 노트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어딘가에 타인의 문장이든, 나의 문장이든 쏟아 놓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처음엔 내 글을 누군가 볼까 봐 눈치도 많이 보았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수년 전부터 이곳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펼쳐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너무 뒤늦게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나 입장할 수도 있고 퇴장도 할 수 있는 이곳. 그러나 퇴장하지 않고 꾸준히 이 공간에서 머물며 자신만의 방을 꾸며가는 사람은 이제 다른 이들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머물지 않고 입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초대하기에는 조금은 어설픈 공간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위한 공간이었지만, 타른 이들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늘 '나'에게서 시작한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관련된다. 그렇게 기록한 점들이 연결되다 보면 결국 '나'라는 사람이 더욱 또렷해진다. 나도 몰랐던 나를 계속해서 발견해 간다. 그렇게 방이 여러 개가 만들어지고, 그 방들이 모여 하나의 집이 되어 간다. 많은 이들이 머물고 쉬며 위로와 어떤 도움을 얻어 갈 수 있는....








디지털 기록자로 밥벌이를 하며 산다



디지털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취향을 공유한다. 그 취향을 기록하는 과정은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그것이 필요한 이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그 취향을 모아놓은 디지털이라는 집이 아름답게 꾸며지면, 사람들이 하나 둘 구경을 오게 되고, 정이 들면 자주 방문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쌓여 하나의 커뮤니티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취향은 깊어져 전문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것은 밥벌이로 이어진다.


밥벌이가 자신에게 놀라운 기쁨을 안겨주던 취향을 함몰시키면 안 되겠지만, 우리는 취향으로도 먹고사는 시대가 되었다. 일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덕업 일치'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할 수도 있는 삶에 대해서 누군가는 취향이 일이 되는 순간 기쁨도 상실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도 할 수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허튼데 쓰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단 그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게 유지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돈이 목적이 되었을 때 처음의 순수한 나눔과 기쁨이 상실될 것이다. 이것만 유념한다면 덕업 일치의 삶은 꽤 괜찮을 수 있다.


나는 책이 좋아서 퇴직 후에도 책과 관련된 모든 일 근처에 서성이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책과 관련된 북클럽 정도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어져서 글쓰기, 북클럽 리더, 그리고 지금은 책 쓰기, 책 만들기, 1인 출판, 독립 출판 등 다양한 것으로 확장해 가려고 꿈틀대고 있다. 처음에는 사실 조금 회의에 들기도 했다. 그저 책만 읽는 순순한 기쁨만 누리고 싶은데 그것이 상실될까 봐 걱정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일을 하려니 그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웠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책이라는 물건은 평생 내 친구이자,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 그리고 내 밥벌이의 기초가 될 거 같다. 나의 기쁨을 나눌 수 있고 그것으로 삶도 영위할 수 있다면 덕업 일치의 삶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움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