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알고리즘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좋은 콘텐츠들을 손쉽게 얻고,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있었을까. 더불어 구독 경제 시스템은 발 빠르게 우리의 취향과 선호도를 파악해서 관심 콘텐츠들을 먹기 좋게 눈 앞에 놓아둔다. 과거에는 신문과 우유에만 그쳤던 구독 서비스는 여러 형태로 확장되었다. 영화, 에세이, 신문기사나 경제정보, 강의, 책 요약 서비스 등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저렴하다는 이유로 구독 서비스 몇 개씩은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현재 두 개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열자마자 좀 전에 클릭했던 아들 운동화 브랜드와 똑같은 것이 눈앞에 보였을 때 착각했던 어떤 날이 떠오른다. 넷플릭스는 고객님의 취향이라고 갖가지 보기 좋은 형태로 제공해 준다. 인스타그램에서도 내가 좀 전에 눈여겨보았던 콘텐츠들이 계속 보인다. 남편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은 알고리즘! 참 쉽고도 편한 세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잘 정리된 콘텐츠, 손쉽게 요리된 나의 취향 묶음들에 저항감이 올라온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영화가 내 취향이라고?', '난 이 영화 보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좀 색다른 거 없어?', '난 새로운 것도 좋은데 말이야.', '그 책 말고 조금 다른 장르의 책은 없을까?' '그 장르라면 이미 난 신물 나게 읽어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증상은 허무함과 짜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술이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해 주다 보니 인간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에 소홀해진 것이다. 요즘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이고 그 삶을 추구하지만, 왜 많은 부자들은 다시 자신만의 일터로 돌아와 일을 하는 것일까. 쉼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로서 자신을 찾고, 의미를 얻는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을 때, 신체의 힘, 존재의 힘은 약해진다. 편리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편한 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움직이고,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자체로부터 힘을 얻고, 존재 또한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돈이 조금 들더라도 오히려 손으로 만들고, 감성적인 아날로그 공간을 찾아가고, 먹고 만지고 손으로 하는 경험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호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스스로 움직여야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제공하는 편리한 서비스를 뒤로 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공간을 찾아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감정을 빠짐없이 느끼며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훈련을 해야만 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알고리즘을 잘 활용하되,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은 매우 활동적이지만 매우 수동적"이라고 지적한다. 활동성이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지시하고 조종하는 활동성"이라는 것이다. 온갖 알고리즘 굴레에서 나의 취향이라며 가져다주는 보기 좋은 떡밥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수동적이기에 실제로는 공허하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콘텐츠 맛집으로 인해 배가 부른듯하지만, 실제로는 허무함을 느낀다. 내가 이것에 기여한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에리히 프롬은 이런 "분주함은 게으름과 같다"라고 꼬집는다. 왜냐하면 "내면 활동성의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보이기에는 매우 활동성이 충만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강박적이며 내면은 움직임은 빈약할 뿐이다.
SNS 잠시 꺼두기
오래전 일터에서 안식년을 받았었다. 안식년을 부여받았음에도 두 달 동안 나는 무척 힘든 시기를 보냈다. 왜냐하면 내 몸은 쉬고 있었지만, 내 뇌와 마음은 끊임없이 일을 재생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스템 속에서 돌아갔던 일의 패턴이 내 몸에 새겨져 멈출 줄을 몰랐다. 후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쯤 이것을 하고 있을 텐데. 일터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밴드에 들어가 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야 했고, 이전 사람들과 연결된 페이스북을 끊어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쉬는 법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쉬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알고리즘도, 조직의 시스템도 '분주함'이라는 가면 속에 숨어 우리의 존재를 서서히 죽일 수 있다. 주도적이고 선택하는 내가 아닌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사람의 숨통은 끊어지고, 내 존재는 고요해질 것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연결의 시대에 SNS를 잠시 꺼두는 것은 어떨까. 의식적인 노력과 세팅이 필요하다. 하루 5분, 일주일에 하루 이렇게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뇌와 손은 교묘하게 만들어놓은 알고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연결이 아닌 오로지 내 존재와의 오프라인 만남은 나를 보듬는 시간이다. 나를 다시 숨 쉬게 하고 나를 살아있게 한다.
속도를 줄이고
'지금'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려면 나와의 온전한 대면이 필요하다. 어느 날 TV를 켜고 리모컨 버튼을 만지작거리다가, 각국의 여행 상품을 홍보하는 홈쇼핑에 잠시 머무를 때가 있다. 잘 큐레이션 된 장소와 숙박, 음식, 체험 서비스, 넘치지 않는 기간 그리고 합리적 가격까지 그것을 시청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벌써 그곳에 다녀온 기분이다. 현대인들에게 이만한 편리한 여행 서비스는 없을 것이다. 검색이라도 내 노력 하나 들이지 않고 돈과 몸만 있으면 친절한 가이드의 안내와 비행기에 몸을 싣기만 하면 손쉽게 그곳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본다. 내가 계획하지 여행 장소, 내 속도를 조절할 수 없는 여행 기간, 획일적인 숙박과 음식 일정, 사진 찍다가 다 소비해 버릴 짧은 투어들, 급히 먹은 음식이 체하듯 나는 진정한 경험이라는 것을 하고 올 수는 있을까? '나 이런 곳에 다녀왔어.'라고 SNS에 자랑할 수 있을지언정, 나는 정말 그곳에 다녀온 것일까. 그곳의 풍경과 독특한 그 나라만의 체취, 소리, 감각을 네모난 사진 말고 울퉁불퉁한 내 몸에 진정 담아올 수는 있을까?
온갖 여행 상품, 체험 서비스 등의 빠른 자극이 흥분을 가져다주겠지만, 나에게는 조금은 느린 여행이 필요하다.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내 몸을 통과할 시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삶에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 늘 줄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멈추고 싶을 때 멈추지 못하고, 속도만 내야 한다면 언젠가 탈이 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속도만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쉼과 여백이 있는 느린 여행, 느슨한 연대, 슬로우 리딩, 느린 걸음을 다시 되찾으려 한다. 누구도 나를 압박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속으로.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사람
독서와 글쓰기에 진심인 독서운동가
말과 글로 나를 치유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책마음 변은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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