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극복하려면
이 글을 쓰는 아침은 월요일이다. 월요병이라는 말이 있다. “와 월요일이군. 이 아침을 기다렸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이제 시작해 볼까?” 라며 설레고 고대하는 마음으로 월요일을 맞이하는가? 아니면 “벌써 월요일이네. 빨리 금요일이 왔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으로 월요일을 시작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아침을 시작하는지에 따라 한 주 간의 일에서 얻는 성과도 다르지 않을까 한다.
월요일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아마 시기와 컨디션, 일의 종류에 따라 마음가짐은 달라질 것이다. 나의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건대, 20대는 일이 좋았다. 좋았지만, 익숙하지 않거나 맞닥트리기 싫은 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어떻게든 그 일을 회피하고 싶었다. 그 안에는 “일을 잘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함께 평가라는 두려움이 뿌리 박혀 있었을 것이다.
30대는 조금씩 일에 익숙해져 갔지만 결혼과 양육이라는 새로운 삶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가 한껏 높아진 시기다.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존재의 미숙함, 일의 과부하 등에서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통과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때우는 방식의 하루가 많았던 거 같다. 존재가 단단하지 못하니 주변에 많이 휘둘리고, 그로 인해 좋아하는 일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나를 돌아보고 채울 수 있는 쉼이 간절히 필요했던 시기다. 너무 많은 일은 존재와 삶을 소모시킨다.
40대는 일도 존재도 어느 정도 성숙해졌다. 그러나 연차가 올라갈수록 좋아하는 일이라도 원하지 하는 일의 분량 또한 많아지면서 삶의 즐거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루의 최소 8시간 그 이상을 일에 쏟는 양을 생각했을 때 일은 삶의 질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조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다시 고민이 깊어졌다.
40대 중반 즈음 퇴사하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하는 일의 대부분은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관련된 콘텐츠를 발행하는 일이다. 그렇게 2년 이상을 몰입하며 살았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책도 여러 권 출간할 수 있었다.
1인 기업인들을 양성하는 한 교수님은 ‘삶과 일은 하나다’를 외치셨다. "그래,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삶과 일은 하나가 될 수 있겠지.", “20대 그렇게 일이 좋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어.”라고 다짐하며 지금을 살고 있다.
나의 하루는 새벽 3시 반, 또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5시에 있을 새벽몰입독서 온라인 줌방을 열 준비를 하기 위해,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오늘 소개할 책 한 권을 들고 나만의 독서 삼매경으로 빠진다. 그 이후에 계속 남은 독서를 이어가며 오늘 SNS에 올릴 글을 써 본다. 그러면 오전이 어느새 지나간다.
오후에는 이런저런 책을 훑으며 저녁에 있을 모임이나 강의를 준비한다. 요즘에는 거의 온라인 모임이다 보니, 저녁에 강의나 모임이 많다. 또는 직접적인 독서와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여러 잡다한 일들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모임 홍보나 모임 후기를 위한 카드 뉴스 제작, 공동저서를 쓰시는 분들의 글을 완성하기 위한 반복적인 퇴고 작업, 서평단 책 발송, 영상 작업 및 발행, 책 디자인 편집 등 말이다. 물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고, 충분히 쉬어 주기도 한다. 하루의 일상을 돌아보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로 채워져 있다. 난 워커홀릭이며 내 일을 사랑한다. 정말 일과 삶이 하나인 것처럼 살고 있는 요즘이다.
나뿐만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일을 사랑하는 시대가 있을까? 이제 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단순히 연봉만이 아니라 자기 실현성이 있는지의 여부로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직장도 이런 현실을 반영하려고 애쓰고 있다. 일은 현대인에게 자기 정체성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200여 년 전만 해도 일에 대한 이런 관념이 없었다. 일은 그저 생계를 위한 노동이며, 심지어 아주 고대에는 그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저주'였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이나 일에 관한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일이 저주라니. 현대인에게 일이 존재와 삶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고 해도 현재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일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겠다. 이들은 기계로 인해 노동이 없어질 수 있는 미래가 속히 오는 상상을 즐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이들은 일과 자신을 매우 밀착시키며 존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 일이 곧 나인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한 사람의 가치를 생산량으로 본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필요하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생산해야 그 가치가 인정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발설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일터에서 2년의 안식년을 주었다. 그런데 쉬는 첫 2~3개월이 무척 힘들었다. 몸은 쉬고 있는데 뇌는 기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 즈음이면 '후배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겠지, 이번엔 어떤 일을 기획했을까? 잘하고 있을까?' 등 정신적으로는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과 함께 철저하게 나를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었다. 나는 멈추는 법을 몰랐고, 좋아했던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 생산하는 기계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과정을 겪다가 탈진하고 번아웃에 빠져 버린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현재 일은 저주보다 축복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이라는 녀석이 우리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릴 때이다. 내 존재와 삶 전반을 침식할 만큼. 일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며 종교가 되었고,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는 이것을 종용하며 지향한다.
《워킹 데드 해방일지》의 저자 시몬 스톨조프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일은 우리 삶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현대는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일이 우리 존재와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직업인일 뿐 아니라 배우자, 아내, 이웃, 예술가, 여행가 등 다양하다.
“일이 삶의 중심에 있는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여유 공간이 없다. 그러나 한 면만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일하는 사람이자 형제자매이고, 시민이면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며, 동네 이웃이다.”
패트리샤 린빌 교수 한 심리학 연구를 통해 스스로를 다채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피실험자일수록 스트레스를 겪고도 우울증과 신체적 질병이 덜 하다고 밝혔다. 우리의 정체성이 어느 한 측면으로만 쏠려 있으면 그것이 직업이든 순자산이든 그 한 가지로 자존감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이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의미의 원천이 다양하면 인생의 어쩔 수 없는 위기에도 잘 대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정체성은 식물과 같다.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야 자란다. 물을 주고 가꾸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금세 시들 수 있다.”
자신을 이루는 정체성은 한 가지가 아니다.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다 담지 말라는 말처럼 우리 정체성이 일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정적이지 않다. 생명에게 쏟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애정을 기울이는지에 따라 살아날 수도 있고, 시들해질 수도 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란 인간이다."
“우선 일에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인생의 다른 의미 있는 면들을 잃는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답시고,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너무 한 가지에만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엄마, 이웃으로서의 역할도 최소한으로 하고 있는 요즘이다. 일은 결국 관계로도 이어진다. 일의 편협성은 관계로도 이어진다. 결국 내 존재와 삶의 다양한 면들을 무시하게 된다.
성과를 향한 욕심과 “생산성이 너야”라는 자본주의의 목소리에 휘둘려 그저 존재하는 ‘나’로서도 충분하다는 감각, 일 외의 다른 존재로서의 나는 보살피지 못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일을 많이 하면 생산성도 무조건 높을까? 그것도 아니다. 2014년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 교수 존 팬카벨의 연구에 의하면, 노동 시간 50시간을 넘기면 시간당 생산성이 급격하게 감소되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70시간을 넘게 일한 노동자는 56시간 동안 일한 노동자보다 더 많이 생산해내지 못했다.
얼마 전 철인 3종 경기를 10년 이상 해오신 50대 중후반 여성을 초청하여 '중년의 운동' 특강을 내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서 열었다. 사실 나에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해서였다. 하나에 몰입도 좋지만, 인생 후반에 많은 것을 좌우할 내 몸도 이제 돌봐야 한다. 삶을 풍부하는 것에도 일 이외도 많다. 일은 삶에 너무 중요한 요소지만 전부는 아니다. 일이 나를 잠식하지 못하게, 일하는 기계가 되지 않도록 삶의 반경을 넓혀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