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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Sep 30. 2023

모녀 사이

함께 만들어가는 추석이 되기를






추석을 보내고 있다. 이날에는 전 국가적으로 거대 이동이 이루어지고, 흩어졌던 온 가족이 모인다. 평상시에 볼 수 없던 음식들이 차려지고, 며칠 연속 매끼를 다량의 음식을 흡수하고, 빈 그릇들이 치워지는 과정이 기계처럼 반복된다. 어릴 때는 몰랐다. 이것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이루어짐을. 그리고 그것이 조금은 부당한 처사임을.      


어른이 되어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양쪽 집안을 오가며 이제 주어진 음식만 받아먹는 처지가 될 수 없었다. 나 또한 긴 연휴 동안 그 노동이라는 것에 동참해야 했다. 나는 딸 셋인 집안에 살았지만, 요리도 설거지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잘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평상시 잘하지 않은 그 일들을 해야만 하는 날이 명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절은 기다려지는 즐거운 날이 아니라 어떤 각오 같은 것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결혼 이후 불쑥 찾아온 그 대열에 나도 억지로 껴야만 하는 처지가 영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았다. 물론 결혼은 단지 두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집안이 합쳐지는 일이기에, 내가 혼자 살아왔던 방식을 고집하며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엄마의 오랜 노동을 결혼 후에야 생각해 보았다. 종일 일을 하고 집에 와서도 남아 있는 집안일을 해내고, 자녀 넷까지 어떻게 키웠을까. 지금은 여든이 넘으셨음에도 명절마다 여전히 음식을 차려 놓으신다. 예전보다 많은 것이 간소화되었지만, 그래도 이제 딸들이 장성했으니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놓지 말라고, 우리가 오면 함께 쉬엄쉬엄하자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이번 명절에도 여실히 전이며 필요한 음식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엄마가 그만 쉬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더 일찍 가서 준비를 거들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늘 충돌한다. 이제 그렇게 많은 음식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형식 또한 거추장스럽다. 엄마 세대의 고단함이 노화와 함께 몸 구석구석에 선명하게 새겨져 말하고 있다. 늘 희생만 해 오셨던, 이제는 그러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연세임에도 살아온 방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는 엄마가 이제는 자녀를 더 의지해도 된다는 마음이 명절 때면 더욱 든다.      






권여선의 소설 《각각의 계절》 속 단편 <실버들의 천만사>에는 모녀 반희와 채운이 등장한다. 엄마 반희는 돈 잘 버는 남편, 똑똑한 아들과 딸이 있음에도 아직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이혼을 선택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아빠 재혼이 취소된 후, 장성한 딸 채운은 엄마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함께 하룻길 여행을 제안한다. 그런데 어째 이들 사이에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갑자기 차를 세우며 공황 장애를 겪는 딸의 모습, 그것이 엄마의 빈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소설은 암시한다. 딸은 초등학생일 때부터 엄마가 그런 선택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늘 불안했다. 엄마는 이혼 후에도 서로 딸, 엄마라는 호칭을 애써 피하고, 딸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 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반희의 이런 선택은 모녀 관계가 끊어진다고 해도 딸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자녀 때문에 자신다운 선택을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엄마들과 달리, 매정한 듯 보이지만 아직 엄마로서 할 일이 남아 있을 때에 집을 떠난 한 여성. 그리고 서로에게 남겨진 상처들, 그러나 연결되어 있는 사랑의 끈. 상처와 사랑은 실처럼 연결되어 현재의 모습을 낳았다.     


같은 성을 가진 모녀 사이는 나이 들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증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희생과 헌신의 표상으로 살아온 부모 세대, 특히 엄마의 존재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딸의 세대에게는 더 이상 모델이 아닐 수 있다. 그 희생으로 자녀는 자라나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딘 엄마에게 감사해 하지만, 후에 남겨질 모든 상처를 예상하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도 있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엄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건져 준다.   

  

딸은 여행 중에 엄마에게 두 가지를 제안한다. 여행 중 휴대폰 꺼 두기, 친구처럼  서로에게 ‘~씨!’하고 이름 부르기 아빠, 아들을 지칭할 때도 ‘~씨!’로 부르기로 제안한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지는 게 좋지”


자신의 이름을 수십 간 잊고 살아온 한국의 엄마들.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엄마의 존재들은 ‘~ 아내’, ‘~엄마’로 대체된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독립성을 서서히 잃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호칭은 가정 내 권력 구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씨!’라는 호칭에는 이것을 뒤집는 특히 엄마의 이름을 찾아 주는, 그저 역할이 아니라 이름으로 당당히 살아왔던 스무 살의 기억해 내고, 한 인간으로의 자리를 찾아 준다.      

모녀가 여행하는 도로 길가에 벚꽃이 등장하는데, 아주 짧은 대화 몇 문장이 나온다. 이유는 엄마 반희가 앉은 조수석 오른쪽 도로변만 온통 벚꽃 천지였던 것이다. 딸 채운은 불공평하다는 듯이 “근데 왜 엄마 쪽에만 폈을까. 아니 반희 씨 쪽에만.”이라고 묻는다. 이에 엄마는 “내 쪽에만 펴서 분해?”라고 묻고, 채운은 “아니, 불공평하잖아.”라고 대꾸한다. 반희는 이어서 “내 생각에는 처음에 양쪽 길에 공평하게 벚나무를 심어놨는데 도로를 확장하거나 그런 이유로 채운네 씨 쪽을 베어냈을 가능성이 높아.”라고 답한다.      


아주 짧은 대화가 차의 속도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이 또한 한쪽을 완전히 베어낸 가족 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공평하게 심었는데, 어떤 이유로 한쪽만을 베어냈을까 가능성. 그러니깐 가정에서도 어떤 이유로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숭고한 사명’을 받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지우며, 한쪽을 베어냈을 가능성.      


채운은 아빠의 재혼에 관심이 없느냐고 묻는다. 이에 반희는 말한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반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며, 환경이 안 바뀌니 도망치고 싶었다고. 그냥 도망치면 될 걸 결혼으로 도망친 게 실수였다고 말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돈 잘 버는 남편에 똑똑한 아들내미 내팽개치고 이혼한다고. 나는 채운 씨가 제일 마음에 걸렸는데. 그래도 이혼한 거 보면 내가 이기적인 게 맞긴 맞는가 봐.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죽기 전에 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놓고 싶어서.”     


그러나 딸 채운은 그런 ‘엄마의 빈자리’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못 쉬는 고통을 겪는다. 그는 언젠가 엄마가 떠날 줄 알았고 늘 불안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런 채운은 엄마의 선택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깐. 그러면서도 묻는다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 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그녀는 이 말을 하며 벌떡 일어나 가슴을 누르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반희는 이런 채운을 보면 묻는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하고.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마음을 고쳐 먹는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단단히 붙들어 매자.”라고.     


그리고 다짐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 가족과 모든 인연을 끊고 집에도 오지 못했게 했던 행동, 딸과의 대화 속에서도 ‘엄마’, ‘내 딸’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았던 선택들을 이제 그만두기로.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며 살기로 말이다. 딸의 불안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내 엄마가 소설 속 반희처럼 독립 선포를 해주지 않아서 고맙다. 그녀의 희생이 없었다면 나도 채운처럼 남모를 불안을 겪으며 병 하나는 달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같은 여성으로 자녀들이 어릴 때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셨더라도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불공평한 노동에서는 해방되고, 돈 아끼지 말고, 자녀들 걱정은 덜 하고, 더욱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셨으면 마음도 든다.  

   

추석의 풍경도 바뀌고 있다. 모든 가족이 모여야 한다는 강박도 깨어지는 듯하다. 서로 합의하에 각 가족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해외로 국내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음식도 형식도 간소화되어 가고 있다.     


추석이면 엄마의 노동,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신의 희생으로 가정이 존재하고 생명이 자라났지만, 한쪽에게만 강요된 희생은 불공평하고 착취와도 같음을 이제는 안다. 과거와 달리 많은 것이 변화되고 있다. 아내, 엄마의 역할도 있지만 그 누구에도 종속되지 않는 ‘나’의 삶 또한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의 삶을 살아내느라 미처 엄마의 삶을 보듬을 여유는 없는, 명절이면 여전히 여든이 넘은 엄마의 그 희생과 노동에 의존하는 이기적인 나를 본다.      


그래도 이번 추석에는 왜 사위에게 일 시키냐며 딸들을 다그쳤던 몇 년 전 친정아버지가, 눈치 보며 음식을 세팅하는 정도 거들었던 사위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번에는 제가 설거지할게요.”라고 말해 줘서 좋다. 느리지만 매년 나아지고 있다. 한쪽의 희생으로 풍성해지는 날이 아닌 성과 나이를 떠나 누구도 억울하지 않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더 나은 날을 매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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