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빛이라도 어둠을 이길 수 있다면
가끔 의문이 든다. 독서와 글쓰기 모임 대부분의 구성원은 왜 여성들일까 하는. 내가 함께했던 북클럽을 돌아볼 때도 남성은 한 명이었고, 대부분은 여성으로 채워졌다. 때론 이런 현실을 보며 좋은 책을 읽고 쓰고 떠들며 나눌 수 있는 공간에 남성들이 소외되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런 공간에 여성들이 더 득세인 것은 그동안 많은 영역에서 여성들이 제외되었기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랫동안 여성들의 목소리는 소외되어 왔다. 여성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시기가 100여 년 정도뿐이 되지 않았다. 투표로 당당하게 정치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것도 몇십 년의 역사뿐이 되지 않는다. 모든 자유와 독립의 역사가 그러하듯 지금 누리고 있는 여성의 권리는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여러 여성이 투쟁했고, 대가를 치렀다.
우리 할머니 세대에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아주 소수의 특권층만 가능했다. 내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외삼촌 두 분은 그 시절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지낸다가 은퇴하셨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명의 이모 대부분은 최소한의 학력만 가졌을 뿐이다. 내 엄마는 그나마 옷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셔서 그 기술로 집안을 돕느라 오히려 공부를 더 못하셨다. 아마 이런 비슷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의 집안에 공통으로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딸 셋에 막내아들 하나이다. 나는 장녀로 자라면서도 한 번도 내가 여성이라는 것에 좌절감이나 소외감을 경험한 적이 없다. 부모님이 바쁘시기도 했거니와 아들이라고 더 우대하지도 않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터에서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 많던 여성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일 자체가 맞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결혼과 육아 때문이었다. 일 자체가 문제였다면 남성들도 똑같이 사라졌어야 맞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수십 명의 남성이 있는 틈에 홀로 일터를 지켰던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 여성이라는 존재,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아졌다. 왠지 모를 불편함의 근원을 무의식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왜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왜 리더십 팀에는 남성들이 늘 더 많을까? 여성에게 육아와 가사노동의 짐을 더 많이 지워지는가? 등 의문이 들고, 좌절하고 방황할 때마다 끊임없이 읽고 읽었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답이 보일 때까지 찾아다녔다. 물론 모든 문제에는 두 가지가 엉켜 있다.
최근에 읽었던 《희미한 빛으로도》의 최은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성이다. 일곱 개의 단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각 단편에는 세대를 넘나드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할머니, 어머니,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북클럽에서도 함께 읽고 토론했는데 (현재 북클럽 회원도 모두 여성이다.) 읽고 난 후, 우리 모두에게 진한 여운이 남겨졌음이 느껴졌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니 나 또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정과 직장에서 말하지 못했던,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인지 희미해서 끄집어낼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소설 속 주인공이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희미한 빛으로도>, <몫>이라는 단편에는 읽고 쓰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 단편 <몫>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자 한다. 소설은 대학 도서관 입구에서의 해진과 정윤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두 만남은 서로에게 대학 시절을 기억하게 한다. 정윤은 해진이 담고 싶었던 선배였다. 해진은 선배 정윤의 글을 통해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정윤은 사회과생 학생으로 당시 당당하고 똑 부러진 여성이었다.
학교 편집부에서 발행한 정윤의 글을 읽고 해진은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그렇게 해진은 선배 정윤을 따라 편집부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동기 희영을 만난다. 편집부 회의에서는 함께 토론하며 이슈를 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취재하며 글을 써 발행했다. 희영 또한 말과 글로 자기 목소리를 똑 부러지게 하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유려한 문체는 돋보였지만, 종종 회의를 긴장감이 돌게 만들기도 했다. 희영의 글은 탄탄했고, 그녀의 글을 통해 해진은 자신이 오랫동안 남성들의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희영은 3학년, 정윤은 4학년 때 편집부를 떠났다. 희영의 타인에 대한 공감력은 글쓰기 재능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게 했다. 그녀는 읽고 쓰는 것만으로 부채감을 털어버리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면서 기지촌 활동가로 살아간다. 존경했던 정윤은 편집부 용육과 결혼하고, 본인의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그의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희진은 그녀의 선택에 대해 실망했고, 유학을 갔어야 한다면 정윤 이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해진이었다. 해진은 이들의 영향으로 조금씩 깨어나고 읽고 쓰는 경이와 기쁨을 알아갔다. 해진은 이제 글을 쓰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조금씩 말로 글로 막연하고 덩어리 진 생각들을 종이 위에 풀어놓으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 속 희영은 말한다. 당신도 정윤과 희영처럼 타고난 글재주가 있었다면 이렇게 노력했을까 하고. 자기 한계를 경험했기에 오히려 그것을 넘나드는 희열로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세 여성의 삶을 보며 나는 정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있건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너무 희미해서 꺼져가는 빛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젊은 날, 읽는 이들이 머무는 공동체가 빛처럼 내게 찾아왔고, 새로운 생각의 자극들은 나의 내면을 서서히 깨워 주었다. 당찬 선배와 동기들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조금씩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어쩌면 나는 정윤과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잘 안되고, 끊임없이 좌절했기에 그 결핍과 열등감이 더 읽고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나 하는. 스스로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늘 소외되었던 감각에서 벗어나 존재의 힘을 느끼고 싶어 더 읽고 쓰려고 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제는 읽고 쓰며 나를 세워갔던 시간이 쌓여 누군가에게 “함께 읽고 쓰자!”라고, "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같이 하자!"라고 손 내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희미한 빛이지만 그 빛들이 모이면 절대 약하지 않음을, 희미한 빛이라도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