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은 살아있다》"그들의 충과 의, 우리 마음 속에 여전히 숨쉬고 있어
의병은 참혹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서도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다. 그중 김천일, 고경명, 조헌 같은 의병장처럼 역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름 없이 싸우다 죽어간 이들이 훨씬 많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었는지도.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 마음 속에 여전히 숨쉬도록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의병은 살아있다》는 전국을 누비며 답사한 생생한 현장, 중간 중간 소개되는 사료(史料)와 도표·사진 등 신문기자 출신답게 의병과 후손을 잇는 인터뷰가 실렸다. 또한, 정읍시와 나주시의 문화관광해설사의 대화체를 통해 찾아가 보고 싶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 임도혁은 그의 전작 <기묘사화, 피의 흔적-士林천하 이렇게 만들었다>에서 조광조와 양팽손, 기묘명현의 이야기(관련기사 : 죽음도 초월한 두 선비의 브로맨스)를 담고 있어 전남 화순군과의 인연이 깊다. 이번 책에서는 의병장 최경회와 논개를 소개하고 있어서다.
호남 의병 거느리고 진주성 지키다 순절한
최경회와 그의 뜻을 받든 논개
최경회 장군은 모친상으로 시묘살이 중에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게 된다.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화순 동복에 머물고 있던 문홍헌이 최경회에게 고경명의 패전 소식을 전하며 함께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렇게 형 경운 경장, 아들 홍기, 조카 홍재, 홍우와 함께 화순의 의병청을 설치하는 데 이를 '호남우의병'이라고 한다.
의병장 김면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원군 요청으로 진주로 향하는 데 그의 부하들은 어찌 호남을 버리고 영남까지 구원해야 하냐며 구원 요청에 반대한다. 하지만, 진주를 지키기 위해 최경회 장군은 이렇게 말하며 제1차 진주성 대첩에서 수 천명의 의병과 함께 상복을 입은 채 전투에 나서 왜적을 물리친다.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
성이 있으면 내가 있고 성이 망하면 나도 죽어야 한다
촉석루의 세 장수는
한 잔 술로 웃으며 긴 강을 가리키노라
강물은 도도히 흘러 가니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
이렇게 쓰여있다.
1593년 6월 10만 왜군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인데 9일 밤낮으로 혈전으로 치렀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결국 최경회는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일제히 남강에 몸을 던졌다.
최경회가 세상을 뜨자 그의 뜻을 잇겠다고 나선 의암 논개. 1574년 전라도 장수현 지금으로 치면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서 양반가의 자녀로 태어났다. 논개가 네 살 때 아버지 주달문이 세상을 뜬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 숙부였던 주달무가 지방 토호의 아들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돈을 챙겨 달아났다. 논개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논개와 친정으로 도망갔는 데 이를 고발해 장수 관아에 갇히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장수현감이 바로 최경회였다. 그 인연으로 1590년 최경회는 논개를 부실로 맞이한다.
시묘살이 중이었을 때 논개는 장수로 돌아가 기다리다가 함께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이후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최경회를 따르며 부지런히 병사들을 뒷바라지 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남편인 최경회를 따라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남강 촉석루에서 전승 축하연을 벌일 때 관기로 위장한 논개는 촉석루 바위 아래로 왜장의 허리를 감싼 채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그 바위 이름이 의암이었고, 논개의 호가 되었다.
호남의 난중일기, 수은 강항의 <간양록>
수은 강항(1567~1618)은 정유재란 당시 가족들과 함께 왜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간양록>은 1597년 9월부터 1600년 5월까지 포로 생활 중 쓴 글과 귀국 후 쓴 글 등을 한데 모아 정리한 책이다.
고향 땅 전남 영광에 잠시 휴식 차 왔다가 정유재란을 맞게 된다. 의병을 모집하지만 왜적의 기세는 더욱 거세져 식솔들을 태우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뱃사공의 잘못으로 왜군에 붙잡힌다. 강항은 물에 뛰어들려 했지만 실패했고, 어린 딸과 아들이 눈앞에서 물에 빠져 죽는 비참한 꼴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이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를 얻었는데."
힘든 억류 생활 중에서도 고국에 도움이 되려 적국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여러 방책을 제시한 기록물로 <간양록>인 통해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강항 선생의 모습은 이렇다.
진주 강씨 강항의 후손인 강대의 이데일리 대표에게 <간양록>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다. "조선인 관리로서 왜적에 붙잡혀 포로가 된 죄인이지만 최선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라는 철저한 목표 의식을 갖고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내밀한 정보를 얻어 이를 분석하고 방책을 제시한, 적국에 대한 종합 정세분석 보고서 및 대응책이다.
- 《의병은 살아있다》 304쪽 인터뷰 중에서
그는 제2의 왕인이라 할만한 정도로 왜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 이 인연을 계기로 오즈시와 전남 영광군은 2001년부터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물재 안의와 한계 손홍록, 실록 지킨 두 '영웅'
자칫 의병하면 칼을 들고 왜군과 맞서 싸운 사람만 떠올린다. 노령의 두 선비가 어려운 시기에 깊은 산 속에서 1년이 넘도록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으며 국가의 책을 지켜냈기에 후대에 이르러서 기록이나 유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물재 안의(1529~1596)와 한계 손홍록(1537~1610)이다. 목숨 걸고 지켜낸 매일의 상황을 기록하여 <수직상체일기>로 남겼다.
가을철 단풍 명소로 손꼽히는 내장산의 숨은 아름다움은 <조선왕조실록>이 아닐까 싶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제목을 세상에 달고 나온 유홍준 교수의 책처럼 역사를 알기 전과 후, 장소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계곡을 건너는 여덟 번째 다리인 '실록8교'를 지나자, 용굴암으로 향하는 계단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른 끝에 한 시간여 만에 힘겹게 용굴암에 도착했다. (중략) 실록을 숨기고 지키기에 이만큼 적합한 곳도 없을 천혜의 요지였다. 그러나 당시 안의, 손홍록은 이마저 불안해서 다시 100m 이상 북서쪽으로 올라야 닿을 수 있는 은적암으로 실록을 옮겼다. 이들은 여기도 안심이 안 됐던지 북동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실록과 어진을 다시 옮긴다."
- 《의병은 살아있다》 257쪽 중에서
안의와 손홍록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전주 경기전에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의 어진을 지켜낸 이들도 역시 이들이었다. 임진왜란 중 용인전투를 대패하고 전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꺼이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때 안의 나이는 64세, 손홍록 나이는 58세였다. 적지 않은 고령의 노인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숨길 만한 장소를 고민하던 중 정읍 내장산 은적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중략) 어진은 장식물 등을 제거해 가볍게 한 뒤 눈에 띄지 않도록 보통 물건처럼 위장했다. 둘은 잔뜩 긴장한 채 비장한 심정으로 전주에서 출발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주사고에서 내장산까지 쉬지 않고 약 125리를 하루 만에 이동했다.
- 《의병은 살아있다》 260쪽 중에서
매순간 긴박감과 위중한 순간이었는지 책 속의 문장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힘든 과업이었는지 결국 안의는 1596년 9월 실록을 강화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읍 집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혼자 남은 손홍록은 계속해서 실록 보존에 힘썼다.
박물관에서 감상할 때는 몰랐을 사연까지 담겨있었다. 앞으로는 문화재를 지켜내려고 했던 억겁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면밀히 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述往事 知來者 (술왕사 지래자)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에 대해 알게 해준다'는 뜻이다. 암혹하고 참혹했던 전황 속에서도 의병으로 활동했던 뜨거운 숨결을 기억하며 2025년에 완공될 남도의병역사박물관에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이들과 함께 책장을 넘겨봤으면 한다.
2024년 우리의 마음엔 의병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