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아지트였다
옛날부터 우리 집은 아지트였다. 나는 타인을 기쁘게 하게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곤 했다. 공감과 헌신은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발 벗고 나서서 음식을 만들어준 적도 많았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라면을 끓이고 김치를 내왔다. 친구들은 그런 내가 신기한지 배고플 때마다 우리 집으로 모였다.
시간이 지나자 내가 모르는 놈들까지 매일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슨 소문이 났는지 우리 집은 쉬어갈 수 있는 아지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집에 누군가 찾아와 주니 기뻤다. 나의 부모님은 슈퍼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내가 몰래 과자와 라면을 가져다가 친구들과 함께 낄낄대며 먹어댔다.
그런데 점점 슈퍼 물건을 탐내는 놈들까지 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히 술과 담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예민하고 눈치가 빨라서 그런 친구들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집에는 항상 사람이 득실득실했다. 그 좁은 방에 친구들이 꼬깃꼬깃 모여 앉아 시간을 죽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내가 친구들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무시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끔은 라면을 끓여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분명 동등한 입장이었는데 하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행동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바뀐 내 모습에 친구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 내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잦은 다툼이 일어났다. 왜 옛날처럼 고분고분 굴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한 친구가 뜬금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우리 집에 오더니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서서 나를 불러냈다. 나는 방에 있다가 친구가 온 것을 보고 놀랐다. 녀석의 표정은 마치 전쟁에 나가기 전의 비장한 장군처럼 보였다.
나 : " 무슨 일이야?"
친구 : " 야 너 대학 붙었냐?"
나 : " 아니.. 재수할 거 같은데."
친구 : " 그럼 대학 붙으면 연락해라 (웃음)"
그러더니 우리 집 현관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이후부터 녀석들은 나와 연락을 끊었다. 친구들로 북적대던 우리 집은 어두운 침묵만이 가득해졌다. 녀석들은 마치 농성이라도 하듯이 한꺼번에 나와 절연을 해버렸다. 나는 1년의 재수 기간을 너무나 외롭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나더니 결국 하염없이 목놓아 울어버렸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새어 나오는 소리를 겨우 붙잡으며 긴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1년을 버텨내고 어쩌다 대학에 가게 되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좋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합격하니 뿌듯했다. 대학에 가서 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그만 학창 시절의 친구들은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이후 내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아닌 남이 되고자 하면 비참해진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나를 버리고 타인의 삶을 살려고 했다. 나는 타인을 도우면서 영향력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친구들이 나에게 의지하게끔 노력한 것이다. 그 친구들이 너무하긴 했지만 내 잘못도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없고 타인의 욕구에만 반응하여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미움받은 것이다. 선의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려고 했고 지배하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명언이 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명언이다. 이 명언을 인간관계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녹여낼 수 있다.
남이 아닌 내가 되고자 하면 살 것이고
내가 아닌 남이 되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인간관계를 맺다 보면 나를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다. 타인의 욕구와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너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버리고 모든 것을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좋은 결과롤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나를 잃어버리면 끝이다. 남이 아닌 내가 되고자 하면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남이 되려고만 한다면 비참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