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사랑해서 남겨두고, 너무 사랑해서 떠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빨간머리 소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초록 지붕 집에 사는 빨간 머리 앤은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한껏 끌어올렸던 캐릭터다.
이 캐릭터를 만든 작가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녀의 작품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빨간머리 앤 하나로 스타덤에 오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녀의 작품을 새롭게 발견해보기 위해 출판사 북도슨트가 국내 최초로 번역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단편 소설 2편을 들고 왔다.
특히, 깊은 사랑은 원제가 『구원을 위한 희생 』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거창한 주제보다는 사랑을 둘러싼 솔직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번역가가 『깊은 사랑 』이라는 제목을 따로 붙였다고 한다.
'깊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희생해야하는가?' 이 질문을 가지고 붙인 제목이다.
금혼식
금혼식은 러벨이라는 청년이 오래 전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웠던 노부부가 빚 때문에 보호시설에서 살게 되자 이들을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빨간머리 앤의 서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낸 노부부가 나오고. 그런 노부부의 사랑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한 아이. 마치 빨간머리앤과 마슈-마릴라를 보는 듯하다. 부모-자식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러벨이 자신이 오랫동안 벌었던 돈을 부부에게 건네주고 돌아서서 하는 혼잣말이다.
어이, 친구! 이제 내겐 다시 서부로 돌아갈 여비만 겨우 남았어.
그렇지만 너는 노부부의 기도와 축복도 받았잖아.
네 인생의 초기 자금으로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야.
이 대사를 보면서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이 차가운 바닷물에서 죽어가며 로즈에게 건넨 말이 생각났다.
봐요, 로즈. 그 티켓을 딴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잭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배에 올랐다가 로즈를 만나서 다른 무엇보다 '사랑'을 우선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로즈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희생한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이 몽고메리가 쓴 금혼식의 주인공 러벨도 잭과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깊은 사랑
깊은 사랑의 주인공인 조안은 마을의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다. 그런 소녀가 사랑에 빠진건, 마을에서 망나니라고 소문난 청년 폴. 폴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타고난 본성처럼 그의 혈통 중에 존경받는 사람은 없었고, 그보다 더 나은 코너 미첼이라는 남자가 조안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랑이 대단한가?'에 대해 고민한다. 조안을 어쩌면 자신과 같은 삶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 폴은 모진 말을 하며 그녀를 떠나보낸다.
사실 조안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폴이 감언이설을 했더라면 둘은 더 오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폴은 사랑하기 때문에 조안을 떠난다.
이 두 작품을 읽고서는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인물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에 남겨진 번역가의 후기가 마음을 울렸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 말을 보고 내 일인 것처럼 상상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그럴수도 있었겠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묘미는 책의 처음과 끝에 나온 번역가의 말이다. 번역가가 작품을 어떻게 봐야할지 갈피를 잡아주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몽고메리가 500편이 넘는 단편을 썼다는 것도 번역가는 세심하게 소개해줬다.
또, 놀랐던 건 몽고메리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를 잘 살렸다는 것.
빨간머리 앤의 대사 중에서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라는 말이 있다. 텍스트인데도 굉장히 예쁘게 느껴진다. 이런 특유의 문체를 번역가가 잘 살렸기 때문에 이 책이 더욱 후루룩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은 고작 5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 적은 페이지 안에 작가의 생애까지 꽉꽉 채워넣었다.
알고 보니 몽고메리도 부모가 아니라 외조부모 손에 컸고, 교사 생활을 했었다. 빨간 머리 앤의 삶이 그녀의 삶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빨간머리앤은 작가 본인이었던 것
이런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해준 도슨트 북이라 더욱 감명 깊었다.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오랜 여운이 남았다.이 도슨트 북 시리즈는 현재 21명의 작가를 다루었는데, 시리즈 안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물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