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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스테 Jun 24. 2020

엄마, 왜 노 키즈 존이야?

차별은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가끔 딸아이와 조용한 동네 카페에 간다. 나는 주로 책을 읽고 딸아이는 주로 넷플릭스 영화를 본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에너지를 얻는 시간인지 모르겠다. 주택을 지어 살아본지 이제 1년이 되었다. 우리 집 주변에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2층으로 된 예쁜 카페가 있다. 로스팅도 직접 하기 때문에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카페다. 마당에 꽃나무도 잘 심어놓고 정원도 반듯하게 잘 가꾸어놔서 한 번쯤 가봐야지 마음만 먹었었다.      


며칠 전 특별할 것 없는 주말 아침. 아이는 아이패드를 들고 나는 읽고 있는 책을 들고 걸어서 5분 거리인 카페로 향했다.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노 키즈 존'이라고 큰 글씨로 쓴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 큰 종이는 정말 당당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는 "엄마 노 키즈존이 뭐야?"라고 물었다. 잠시 후 직감한 듯 "아. 나는 안 되는 거래?"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라 키즈라고 하기엔 애매한 나이다. 하지만 들어가면 내 돈 내고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딸아이의 팔을 잡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잠깐이지만 많은 생각을 했다. 일반 음식점이나 카페 업주들은 어린이 손님을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뛰어다니거나 아이를 안 받으면 매출이 늘 수도 있겠지. 손님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권리도 있으니까. 연령을 제한하는 것도 특별한 기준이 없는 것 같았다. 5세 이하, 8세 이하 또는 12세 이하.      


물론 'No Kids Zone'이 아닌 곳을 가면 된다. 그런데 왜 들어가면 안 되는지 설명을 해 줘야 했다. "젊은 손님들이 조용한 시간을 원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들어가서 시끄럽게 하면 폐를 끼칠 수도 있다."설명했더니 아이는 "나는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는데. 너무하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딸아이는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인권의 천국',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뉴질랜드에 잠시 살다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딸아이는 더욱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어딜 가나 존중을 받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어니까. 장애인도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딸아이가 자신이 차별당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 같아서 부모의 입장에서 속상했다.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시기에 자신이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차별은 혐오를 수반한다는 점이 위험하다. 아이에 대한 차별은 아이가 있는 엄마에게도 같은 차별을 수반한다. 자기가 차별을 당하면 타자를 차별하는 어른으로 자라나지 않을까 걱정과 우려가 되었다. 우리는 다들 서툰 시기를 경험하면서 어른이 되었을 텐데.    

 

2017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노 키즈존이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영업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이의 출입이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봉쇄까지 해야 할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몰상식한 몇몇 부모를 본 적이 있다. 좁은 식당 안에서 기저귀를 갈 거나 뛰어다녀도 아이를 제지하지 않는 부모들 말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를 모두 진상 손님으로 몰아가는 것은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 아닐까? 어떤 집단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고정화된 것이니까.      


집에 와서 '노 초등학생 존'과 '노 틴에이저 존'등 청소년 출입을 제한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노 초등학생 존은 강남의 한 PC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초등학생의 입장을 제한하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나치가 '유태인과 개'의 출입을 금했듯이 앞으로 충분히 '노 노인 존' '노장 애인 존'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종업원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진상 손님은 중년 남성인데 왜 중년 남성은 제한하지 않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다. 종업원에게 반말하고 큰소리로 통화하면서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 대부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노 아재 존'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말이 칼이 될 때>의 홍성수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맘충이나 노 키즈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맘충 따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다.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 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길 원한다면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혼하기 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물론 '노 키즈존'이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모습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던 나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까다로운 엄마와 시끄러운 아이들은 눈앞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태도를 단속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노 키즈존'이라는 차별의 언어 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찌르고 아프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차별은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세상을 위해서 '나'부터 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관심'이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봤으면 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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