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강사 엄마도 몰랐던 ‘낭독’의 놀라운 효과
날은 차갑고 한기가 아파트 외벽을 타고 틈새를 따라 솔솔 들어오는 밤, 딱 귤 까먹고 김 폴폴 나는 군고구마까지 먹으면 좋겠지만 한가하게 그럴 수 없어서 딸아이 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펼쳤어요. 아이는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고요.
딸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책을 멀리하더니 급기야 방학 맞이 초특급 미션까지 줬지만 귓등으로도 안 듣기 시작했어요. 예비 중 1의 삐딱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아이의 태도였어요.
“엄마가 문해력 강사인데. 내가 책을 안 읽으니까 좀 그러네. 하하.”
염치라는 건 있는지. 마음 깊이 올라오는 다다다다 폭격 같은 말은 쌓여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해 주니 고맙다.”
서로 적정선을 지켜 가는 게 사춘기 정점 아래에 진입한 아이를 위한 방어책이라 무심한 듯 대꾸를 했어요. 그렇게 책을 펼쳤는데, 저도 요즘 온라인 세계에 빠져 있다 보니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00야, 엄마가 소리 내어 책 좀 읽어도 될까?”
저는 집중이 안 되면 소리 내서 읽는 버릇이 있거든요. 제 요청에 아이가 고개만 까닥.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제가 읽은 책은 <불편한 점심시간, 렉스 오글>이라는 청소년 논픽션입니다. 딱 봐도 소설 같은데 이 책이 논픽션으로 분류된 건 렉스 오글이라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라 그래요.
가난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저자는 무료 급식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었어요. 문제는 밥을 먹을 때마다 “무료 급식 프로그램이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리고 다음 렉스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묘사한 대목을 읽고 있었어요.
"... 난 쿵쾅쿵쾅 걸어가며 키 작은 아이들 몇 명을 어깨로 치고선 소리쳤다. 멍청이들아, 저리 비켜. 말을 뱉고 곧장 후회했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냥 계속 걸어갔다. 리엄과 데릭이 낄낄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날 비웃는 거겠지.... 이제 내가 비렁뱅이라는 게 모두에게 까발려졌다. 원래 올해는 멋진 한 해가 돼야 했다. 그런데 벌써 글러 먹은 것 같다." p.38-39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아이가 불쑥 한마디 합니다.
“엄마, 렉스라는 애 나쁘다.”
“어?”
“아니, 자기 사정이 나쁘다고 친구들을 어깨로 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순간 머릿속에 많은 것이 떠올랐어요.
아니, 듣고 있었던 거야?
아니, 지금 나한테 책 속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는 이미 앞부분에서 렉스의 사정과 비참함, 가난이 아이에게 어떤 일상적인 분노를 만들어 내는지에 공감한 상태라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싶었어요. 아이에게 앞부분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이미 ‘주인공 = 나쁘다’라는 공식을 가진 아이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래, 네 말도 맞아.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다른 사람을 치고 괴롭히는 건 아니지. 그건 인정. 그런데 엄마는 렉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돼. 계속 읽을게.”
저는 계속 책을 더 읽어줬어요. (아, 내 목!)
다음 날 오후, 아이가 저에게 다가왔어요.
“또 책 읽어주면 안 돼?”
“읽어 줄까?”
“응, 엄마 목 괜찮으면.”
그래서 또 열심히 읽어줬어요.
오늘 이야기는 주인공 렉스가 풋볼 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결국 해서는 안 될 말로 싸움이 이어지는 장면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렉스로부터 시작된 일이 급기야 엄마와 새아빠의 싸움으로까지 번져 있었고요. 그 장면은 정말 처참했어요.
"아침에 나가보니 가구가 뒤집혀 있었다. 의자 하나는 다리가 없어졌고 전등은 깨져 있었다. 어제저녁에 먹은 파스타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바싹 말라 딱딱해진 채로. 풋볼 팀 지원서는 갈기갈기 찢어져 색종이 조각처럼 거실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엄마가 날 싫어하니까 나도 엄마를 싫어하고 싶다. 소리 지르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든 말든 난 풋볼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엄마도 철 좀 들라고. 어른답게 행동하고 일자리 좀 얻어서 내 인생을 그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엄마를 안으려고 다가갔다... " p.76
거기까지 읽고 책을 덮었어요.
“엄마, 설거지 좀 해야겠다.”
밖으로 나와 달그락거리며 일을 하는데 아이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평소에는 “심심해. 좀 놀아도 돼?(이건 휴대폰 좀 해도 돼? 입니다) 간식은 맛있는 거 해 줘” 하며 참견이 많았을 텐데요.
수상해서 아이 방에 가 보니, 책을 마저 읽고 있더라고요.
'저렇게 다시 책을 읽으면 좋겠다.' 제 염원을 담아 조용히 방문을 닫았어요. 책과 잠시 멀어졌던 아이가 다시 책으로 돌아오는 건 천운이라고 봅니다.
아니면 책 인연일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