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적어 내려가는 세상
입사 초기에 난 회사에서 나누어준 다이어리를 썼다. 빽빽하게 그렇지만 무질서했던 다이어리 안의 내 여러 가지 메모들과 일정들이 내 머릿속만큼이나 뒤엉켜있었다. 사회 초년생이 늘 그렇듯 나는 일정이 꼬이고 할 일이 꼬여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보다 못한 선배 한 명이 내게 다이어리 정리법과 파일 정리법을 열심히 알려 주셨다. 장장 며칠에 걸친 업무 노하우 공유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 열정적이었다.
선배의 도움과 물려준 엑셀 업무 정리 파일 덕분에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내가 완수하지 못한 업무들을 놓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고, 빼먹는 것보다는 자꾸 기억나서, 아니 더 정확히는 거기 적혀있어서, 귀찮은 일이 더 많아졌다. 난 귀찮지만 회사로서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엑셀 관리 툴을 구글 캘린더로 전환했다. 회사 컴퓨터에서 일정을 저장하면 내 핸드폰이나 개인 컴퓨터에서도 볼 수 있다는 장점 등 엑셀보다 나은 점이 많았기 때문에 나름 뿌듯했다. 나로서는 디지털 업그레이드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랬던 내가 다시 노트를 집어 들었다. 갤럭시 노트나 노트북이 아니다. 종이로 된 진짜 다이어리다.
처음에는 새로 산 아이패드에 힙한 사람들은 모두 쓰고 있다는 '굿 노트'라는 어플을 받아서 쓸까 생각해봤다. 무엇보다 뭔가 있어 보이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휴직하면서 이루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목표가 아닌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결과물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과정조차도 아날로그식으로 손으로 쓴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느리고 둔해 보일지라도, 좀 덜 힙하면 어때.
예쁜 다이어리를 살까 하다가 계획을 바로 짜지 않으면 좀이 쑤실 것 같아서 집에 굴러다니고 있던 회사 다이어리를 다시 꺼내어 그리 예쁘지 않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했다. 우선 몇 달간의 휴직 기간 동안 내가 해내고 싶은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그걸 월별 캘린더에 조금 더 세분화해서 적어보았다. 위클리 란에는 다음 주에 하고 싶은 목표들을 적었고, 오늘이 마감되는 시점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꾹 꾹 눌러 적고 있다. 그날 그날의 목표들이 달성되면 경쾌하게 작대기를 죽죽 그어본다.
캬! 내가 한 땀 한 땀 적어 내려 간 것들을 얻어내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