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모슬포, 어나더페이지
모슬포 항 부근에 있는 이 독립서점은 솔직히 말하자면 별 기대 없이 갔다.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또 갈 곳이 있을까 찾아보다가 간 곳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 '뿐이니까'의 장점은 기대가 적기 때문에 많은 확률로 만족할만한 경험을 하고 나올 수 있다는 곳이다. 이곳 '어나더페이지'가 딱 그랬다. 이 책방 덕분에 나는 여행 중에도, 여행 후에도 아주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책방의 첫인상은 싱그러움이었다. 주인장이 꽃을 좋아하시는지 서점 앞쪽에 화분들이 그득했다. 햇살이 아주 잘 들어오는 위치 덕분인지도 모른다. 들어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부는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라비브 북스처럼 잘 짜인 세련됨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앞쪽에는 제주스러운 소품들도 팔고 있으니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들도 방문해보기 좋을 것 같다.
공간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있다. 한 곳은 판매 중인 책과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커피와 함께 구매한 책 혹은 주인장이 열람을 위해 마련한 책을 읽는 공간이다. 어나더페이지는 여러 가지 취향의 사람들이 책을 고를 수 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읽기 좋은 책이 참 많았다. 평등, 평화 등 주인장의 색깔이 묻어있는 책들이 고루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나는 메인 서가에서 눈에 띄는 색깔의 책을 골랐는데 결론적으로는 성공이었다. 책방에 앉아 반 이상을 훌쩍 읽다가 정신을 차리고 길을 떠나야 했으니까.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자리에 앉아서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남편을 위해 청귤 차 한 잔과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서점 주인장이 직접 내려주는 이곳의 커피는 먼저 커피 취향을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신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고, 주인장은 '르완다' 커피를 추천해주셨다. 향이 좋았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커피집에서도 이 커피를 마시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나 르완다 좋아하네.
무엇보다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참 예뻤다. 정사각형으로 크게 나있는 창에 크게 가득 차 있는 테이블, 그리고 편안한 나무 의자까지. 주인장이 어떤 그림을 상상하며 이 책방을 꾸렸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공간이 작지만 작게 쓰지 않고 충분히 여유를 두었다는 점도 좋았다.
책방을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일까 더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책방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번잡스럽지 않으면서 넉넉하게 주는 동네책방만의 느낌이 있었다.
제주에 들른다면 책 한 권과 따뜻한 차 한 잔 넉넉하게 즐기다 올 만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