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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Nov 28. 2022

자아에 지퍼를 달아둔다

누군가의 영업용 말투를 발견한 날

어느 날인가 꽤나 추운 밤이었다. 퇴근을 하고 버스에서 막 내리는데 건너편에 어떤 남자가 눈에 띄었다. 아니 눈에 띄었다는 게 먼저가 아니었다. 귀에 들렸다.


“아~~ 네네. 그러셨구나. 네넵 그건 그렇게 처리할 부분이고요.”


아주 익숙한 말투였다. 회사 안에서는 저 말투가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는데 집 근처에서 저 말투를 듣고 있자니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통화를 하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집에서 막 나온 차림이었다. 헐렁한 반바지에 맨발로 신은 쪼리 슬리퍼,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가리느라 푹 눌러쓴 캡 모자까지.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통화를 하는 목소리를 듣다 보니 그가 양복을 입고 거래처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마치 느슨한 몸체 안에 타이트한 양복을 입은 자아 하나가 더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고 있다. 이 사람과 만나면 이런 자아가, 저 사람과 만나면 저런 자아가 튀어나온다. 나는 대부분 회사와 집을 오가며 살기 때문에 두 가지의 기본적인 자아를 가지고 산다고 볼 수 있는데, 건너편 길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사람이 그랬듯 집 안에서의 내 자아가 훨씬 더 느슨하다. 회사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집에서는 갑자기 못(아니 안)하게 되기도 한다. 또 회사에선 목소리를 낮출 일을 집 안에서는 끝까지 높이기도 한다. 왔다갔다 하는 자아 속에서 내가 꼭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있다. 회사에서의 자아를 집 문 앞에서 벗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잘 되지 않기도 한다. 회사에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그 자아를 온전히 벗겨내지 못하고, 느슨한 자아에 걸치고 앉아있다. 그러면 느슨한 자아는 꼭 조여져 주저앉고 만다. 집 밖에 나와 회사 전화를 받았던 그 남자처럼 조금 더 노력하기로 마음먹는다.


지퍼를 달아야지. 품질 좋은 YKK지퍼를 쭉 내려 내 편안한 자아를 훅 하고 꺼내 웃는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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