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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Apr 22. 2021

끝마침은 곧 시작이다

사람마다 삶이 숨 쉰다. 숨 쉬는 자에게 생은 허락된다.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존재를 결박하는 제약을 견딘다. 어떤 삶은 생성하고 어떤 삶은 소멸한다. 그렇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흘러간다. 


인간은 삶을 마주한다. 삶의 방식이다. 시대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다. 넓게 바라보면 비슷하게 묶이기도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이 그렇다. 서양인에게 이 지역은 비슷하게 보이는 듯하다. 물론 세 나라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다르니까, 엄연히 다르니까. 서양의 목측(目測)으로 가늠할 수 없는 동양의 지평을 그들은 모른다. ‘아름다움[美]’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대표적이다. 


18세기는 ‘근대’의 시간이었다. 서양인들이 자연, 인생, 예술에 담긴 미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는 시간이었다. 미학(美學)의 탄생. 미학의 기본 개념은 ‘뷰티(beauty)’와 ‘파인아트(fine art)’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해온 지(知)․정(情)․의(意)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결과다. 근대의 서양인들은 실용성과 공리성을 배제한 순수 예술을 꿈꾸었다.   


동양은 다르다. 동양인에게 시, 음악, 회화, 조각, 건축은 파인 아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구성 요소다. 문(文)․사(史)․철(哲)은 언제나 한 몸으로 인생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악했다. 서양의 미학이 철학의 하부 단위로 시작해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으로 발전했다면, 동양은 애당초 이성과 감성으로 인간의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 


돌아가고[還] 있다. 지극히 서양에 치우쳤던 지구의 속도에 제동이 걸렸다. ‘미니멀리즘’이 대표적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함이다. 단소(短小), 짧고 작음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단소하려면 배후에 깊은 생각이 자리해야 한다. 그래야 비울 수 있고 버릴 수 있다. 깊이 있는 사고가 언어의 ‘함축’을 가져오는 이치와 같다. 단소함과 단순함은 삶의 압축이다. 


돌아가고 있다. 모든 것을 단계마다 ‘단절’시키는 서양의 방식이 ‘연결’이라는 동양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엄연한 사실이다. 선택은 고민하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지금 나의 선택이 단절을 가져오느냐, 다른 것과 연결되느냐이다. 


단절은 한 가지 결과만 내놓는다. 지혜롭지 않다. 지혜로운 고민은 지금 나의 고민을 ‘다음’으로 이어준다. 하나의 음(音)이 다른 음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소리가 다음 소리로 이어질 때 완전한 음악이 되듯이, 한 동작이 다른 동작으로 이어질 때 완전한 무용이 되듯이. 일본의 동양미학자 킴바라 세이고(金原省吾)의 말을 빌려온다. “종지(終止)는 곧 발생이다.” 


끝마침은 곧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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