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시대(라고 한)다. 요사이 세상은 나를 알리겠다고 결심한 자에게 유리한 듯하다. 빛을 내는 스크린을 손으로 훑을 때마다 나를 알리겠다는 자들이 아우성친다. 소리 없는 외침! 사람들의 시선은 ‘좋아요’를 누르는 분주한 손짓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자본으로 무장한 기업과 평판으로 무장한 인플루언서가 장악한 SNS와 유튜브는 전쟁터다. 이 브랜드가 휩쓸면 저 브랜드가 몰려오고, 이 인플루언서가 뜨면 저 인플루언서가 저문다. 요상하다.
나는 SNS와 유튜브를 구성하는 자들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요란법석 업로드하는지 묻고 싶다. SNS와 유튜브가 사라진 ‘나’는 무의미한 것인가. 나의 SNS를 훑어본다. 내가 쌓아온 SNS는 무의미하다. SNS에서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있지 않았다. 나의 일상을 정교하게 연출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삶의 구조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헛것을 남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나를 알리는 것일까. 나의 스토리텔링을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스토리텔링은 ‘배경’을 품어야 한다. 배경과 배후가 없이 존재하는 스토리텔링은 없다. 무의미하다. 맥락 없는 스토리텔링은 뜬금없다. 툭툭 끊긴다. 생동감이 없다. 스토리텔링은 다음 이야기로 이어져야 한다. ‘계통’이다. 계통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계통을 장착한 스토리텔링은 단단하다. 견고하다. 내실 있다. 기왕 자신을 알릴 거라면 배경과 계통이 또렷한 스토리텔링의 ‘형태’를 갖추길 바란다.
모든 존재는 ‘형태(形態)’를 띤다. 구체적인 사물은 물론 추상성마저 형태가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용과 도깨비를 우리는 즉각 떠올리지 않는가. 선, 악, 미, 추, 기쁨, 슬픔, 증오, 혐오…… 보이지 않는 존재도 형태를 지닌다. 형태가 부재한 존재는 없다.
인생은 하나의 형태다. 사람의 인생은 무언가를 만들고 보여주는 증명과 증빙으로 이루어진다. 형태는 곧 스타일이다. 대체로 서양의 스타일은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반대로 동양의 스타일은 축소하고 감춘다. 서양은 에너지가 넘친다.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동양은 에너지를 감한다. 정적이 감돈다. 그래서 오히려 기운이 꿈틀거린다.
서양은 달린다. 질주하는 자가 승리한다. 동양은 서행(徐行)한다. 느리게 걷는다. 그래도 지지[敗] 않는다. 서양의 질주는 순위로 판가름 난다. 동양의 평온한 걸음은 그것으로 족하다. 지안(志安), 편안함에 이른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과거형일지도 모른다. 서양의 복제물이 되어버린 지금-여기의 동양과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배경, 계통, 형태를 이야기하는 건 원래대로 ‘돌아가자’고 말하려 함이다. 근대 이후 우리는 서양을 모방하고 이식하고 체화하기 급급했다. 서양보다 더 빨리 질주하고 더 높게 도약하고 더 멀리 나아가려 노력했다. 치열하게 살았다.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이다. 살 만큼 살게 되었으니 기본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삶의 이치를 살피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