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아는 것을 지(知)라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기를 아는 지(知)에 다다르는 것을 ‘노(老)’라고 한다.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이다.
‘다다르다[赴]’는 멈출 줄 아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일이다. 장자는 자기를 아는 일을 ‘총명(聰明)’이라고 적었다. ‘총’이라는 글자를 유심히 살핀다. 귀[耳]가 들어 있다. 총이란 듣는[聽] 일이고, 명이란 보는[見] 일이다. 듣고 보는 일을 합치면 ‘관조’에 이른다.
관조는 자기로서 만물을 비추어보는 것이다. 살피고 돌아보는 것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조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사이’를 보는 것이다. 대상에 집중하지 않고 그것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다. 급하지 않게 굽어보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관조를 ‘노(老)’라는 단어로 압축했다. 관조는 어른의 몫이라고 여겼다. 공자가 15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30세에 홀로 서게 되고[立], 40세에 마음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不惑], 50세에 하늘이 내게 준 사명을 깨닫게 되고[知天命], 60세에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하게 되어 귀에 거슬리는 말에도 마음이 고요할 수 있고[耳順], 70세가 되어서야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처신할 수 있게 되었다[從心所欲不踰矩]라고 인생을 정리한 이유다.
인간은 늙는다. 세월을 거스르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늙음은 살피는 것이다. 돌아보는 것이다. 늙은이의 정열은 노욕이다. 아름답지 않다. 온당치 않다. 자제하고 절제해야 한다. 그것이 늙음이다. 아무래도 젊음은 관조에 익숙하지 않다. 관조하는 젊음은 남세스럽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젊은이는 젊게 살아야 한다. 활기차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미숙하면 어떤가. 경솔하면 어떤가. 치기도 부려보고 실수하고 실패도 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젊음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이를 잊으려 한다. 나이를 초월하려 한다. 나이 들어 위축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한다. 시술과 수술이 넘쳐난다.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위축되는 것이다. 몸이 쪼그라들고 마음이 수그러드는 것이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가 아름답다. 눈가의 주름은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두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월의 이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性), 인간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도(道)다. 무에서 시작해 무로 돌아가기. 그 속절없는 이치를 관조하는 것이다.
유무동근(有無同根), 유무는 동일하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없음을 기초로 해서 있음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