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바꾸려 애쓰지 마~

by 라온써니

“이 단지에 전세가 하나밖에 없어요. 계약하시려면 지금 결정하세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두 달 동안 매주 부동산에 갔다. 학군 수요 때문에 몰리는 지역이라 집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날짜를 맞추어 계약을 진행해야 했다. 우리 집을 사려는 사람과 내가 이사 가려는 집을 동시에 구하는 건 퍼즐 맞추기보다 어렵다. 그동안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다 살짝 떨어지는 추세라서 집 팔기가 쉽지 않다. 딸 중학교 배정 전에 이사 가야 하기에 마음이 급하다.


마음에 드는 전세가 있어 본 바로 그날 덜컥 계약해버렸다. 부동산 정책으로 전세가 귀하다 보니 먼저 계약하는 사람이 임자다. 우리 집 팔릴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나? 살던 집 전세 놓고 또 전세로 가려니 이것저것 신경이 쓰인다. 이사 가려는 동네의 집값이 계속 올라 나중에 아예 못 사게 되면 어떻게 하지? 빚을 내더라도 지금이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이미 계약했으니 마음을 접자. 지금은 집 살 인연이 아닌가 보지. 애써 마음을 달랜다.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한 불안감으로 머리를 쥐어짜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래가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것 아닐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사서라는 직업도 내가 선택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럼, 누가 선택했냐고? 지금부터 사서가 된 사연을 풀어보겠다.


난 원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대학교 입학 원서 낼 때 세 군데를 쓸 수 있다 하여 교대를 쓰고 나머지 두 곳은 즉흥적으로 썼다. 학과 안내 책자를 뒤적이다가 ‘문헌정보학과’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는데 멋있어 보였다. 도서관과 관련 있는 과인 줄도 몰랐다. 원하는 교대에 떨어지고 얼떨결에 들어간 나는 과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도 도서관에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졸업 후 닷컴 붐을 타고 인터넷 벤처 회사에 야심 차게 입사했으나 1년 만에 망하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명예퇴직을 하셨다.


내 인생 이렇게 망하는 건가 싶어 방황하던 중 고등학교 단짝 친구가 공무원 합격전략을 전수해 줄 테니 도전해 보라고 하였다. 친구의 이마에 ‘공무원’이라는 별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친구가 시험 준비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났다. 학원에서 낡고 새까만 책을 들고 나니는 만년 수험생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시간 낭비하고 나이 들어 취직만 더욱 어려워질까 무섭다고 했다. 이런저런 말을 들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도전하는 용기가 부러웠다.


다니던 회사가 망하면서 결국 시간 낭비는 내가 한 게 되었고, 친구는 당당히 합격하여 행복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친구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어!!”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게 이런 걸까? 용기가 났다. 일단 많이 뽑는 행정직을 지원하려 공무원 학원을 방문했다. 그때도 사서직 공무원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학원 시험 안내 게시판을 보고 올해 사서직 공무원을 뽑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경쟁률이 적을까 하는 기대로 단순하게 선택하였다.


내가 모르니 다른 사람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원서를 접수하고 보니 뽑는 인원이 적어서 경쟁률은 더 셌다. 공무원이 된 친구의 격려와 사서직에 대한 정보 부족(?) 덕에 사서 공무원에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 한 번에 합격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이라고 느껴진다.


도서관에 취직한 후 매일 책표지를 보다 보니 자연히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뒤늦게 만난 책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상황은 원하지 않는 대로 계속 흘러갔지만 도착해 보니 도착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 도서관에서 초등 독서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교대에 떨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의 생은 다만 시간이 끝난 지점에서 되돌아보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 인생은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끝났고 지금이라고 알고 있는 이 시간이 그저 내 영혼의 회상이라면 되게 허무할 것 같지? 아무렇게나 막살 것 같고? 근데 그 반대다. 진짜로 받아들이면 되게 편해져.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해.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게 뭘까?


인생은 마음에 관한 시나리오야. 상황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그때 그때 조용히 힘 빼고 네 마음을 들여다봐. 네 마음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


드라마 또 오해영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정신과 의사가 박도경에게 한 말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면 편해질까? 최근 어떤 책에서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글을 보았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포기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어쨌든, 살아오면서 인생은 내 맘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린다고 마냥 좋아할 게 아니다. 반대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집이 안 팔려 시간에 쫓겨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어쩌면 곧 집값이 떨어지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 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 같은 인간 나부랭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늘의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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