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을 유지하기는 너무 어려워

나는 밥 값을 하는 사서가 될 수 있을까

by 라온써니

오전 9시 10분, 텅 빈 자료실에 어르신 한 분이 앉아서 책을 보고 계셨다. 이 추운 날씨에 도서관에 앉아 계시는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자료실 이곳저곳을 체크하며 돌아다니는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가시는 순간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 번쩍 생겼다.

“오늘 날씨 너무 춥죠? 아침에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이 많더라고요.....”

활짝 웃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그분의 리액션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를 감지한 나는 얼른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직원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저분 유명하신 분이에요. 친해지면 자료실 내의 소소한 것들을 엄청 꼬투리 잡아요. 다른 도서관에 다니셨는데 하필 여기로 옮기셨네요.”

‘아차’ 싶었다. 역시나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몇 년 전부터 말했지만 안 고쳐진다면서 불평을 쏟아내셨다.

내 주변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 것 같은데(나의 추측), 평일 오전 도서관에 오시는 어르신 대부분이 남성인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퇴직 후에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 적응력이 떨어져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도서관에 오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책이 좋아서 오시는 분도 많겠지만 오늘 이상한 분을 접하고 나니 생각이 저절로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오늘은 독서회 운영 첫날이다. 처음 독서치료실에 왔을 때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 돈 내고 참석했던 독서회를 근무시간에 운영할 수 있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나도 같이 참여하고 토론할 생각에 꿈이 부풀었다. 아마 디지털 부서에 있다가 책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오니 그저 모든 게 좋았나 보다.

하지만 간사한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는 법!!

독서회 운영 첫날 아침부터 이용자에게 당하고 나니 잊혀젔던 진상 이용자 공포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독서회를 운영하게 되어 너무 좋다는 나의 블로그 글에 도서관에서 독서회를 운영하는 운영자인데 담당 사서가 책에 진심이면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책엔 진심인 건 맞지만 진상 이용자 공포증에 사로잡힌 내가 과연 독서회를 행복하게 하는 사서가 될 수 있을지...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니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독서회를 참석하기 위해 강추위를 뚫고 오시는 분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졌다.

막상 회원분들을 만나 뵈니 이래서 10년 넘게 독서회가 이어졌구나 싶을 정도로 한 분 한 분이 다 보석 같았다. 서로 안부를 물어보는 모습을 바라만 봐도 그 따스함이 나에게까지 스미는 듯했다.

갑자기 한 회원분께서 “선생님은 독서회 참여하실 건가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임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운영만 도와드렸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참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10년 이상 추가 회원을 받지 않고 유지해온 회원들의 끈끈한 유대감을 접하고 나니 내가 참석하면 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운영하시는 데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얼버무렸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과장님이 이 독서회 처음 구성할 때 독서치료실에서 근무하셨다는 것이다. 순화보직 특성상 과장님은 다른 도서관으로 발령 나셨고, 긴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시 우리 도서관으로 오게 되었다. 과장님은 아직도 독서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반가워하시며 첫날 꼭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과장님과 회원들은 10년 넘게 흐른 세월을 뒤로하고 서로에게 따뜻한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이게 얼마 만인가요?”

“저 많이 늙었죠?”

“지금 딸이 커서 대학생이 되었어요”

“어머나~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나이를 생각하면 왠지 서럽지만,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추억과 따뜻한 정을 생각하면 흘러가 버린 세월이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장님과 독서회 회원들 간의 재회를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다.

“과장님 예전에는 사서 샘이 독서회에 함께 참여했잖아요. 그때 과장님이 모래시계까지 동원하여 토론의 흐름이 한 분에게 집중되지 않게 관리해 주셨잖아요. 호호호 그런데 요즘에는 사서 샘이 운영만 지원해 주시고 저희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순간 아까 “참여하실래요?”가 “참여 안 하실 거죠?”의 다른 버전이라고 해석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깐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풀로 가동하며 고민했다.

내가 사비 내고 독서회 갈 때는 드디어 직장에서 썼던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내가 약간은 4차원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독서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든지 말든지 내 속을 마음껏 표현해서 좋았는데, 돈을 받고 다니는 도서관에서는 아무래도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결국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첫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골 이용자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려는 마음은 진상 이용자로 마음의 문이 닫히고, 독서회 열정적으로 참여해 볼까 하는 마음도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부담감에 숨어버렸다.

살다 보면 이상한 사람이, 예상치 못한 현실이 활짝 열렸던 나의 마음을 닫히게 한다. 하지만 행복해지려면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상처가 두려워 마음의 문을 꼭꼭 닫으면 기쁨도 들어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닫히려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열어젖힐 것인지, 첫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너무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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