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색깔이 중요해
햇살이 따뜻한 초봄 오후 매일 다니는 도서관을 벗어나 다른 도서관으로의 출장은 설레는 일이다. 산 밑에 있는 우리 도서관은 수려한 풍경 하나는 어디에도 지지 않지만 매일 보니 식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무를 좋아하는 나에게 매일 보는 산은 분명 나에게 어떤 작용을 하며 위로를 주고 있을 거라 확신하지만, 본능적으로 자꾸 감사함을 잊어버리기 게 된다. 인간의 본성 중 좋은 것은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게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다가 환경이 열악해지면 엄청 그리워하겠지. 어느 책 제목처럼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참 문제이긴 한 것 같다.
점심시간과 겹쳐서 출장 도서관 주변을 거닐었는데 매일 보는 풍경과 다른 새로운 거리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 독서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공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에 배포할 예정이며, 이를 위해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공공도서관 사서 10여 명이 뭉쳤다. 오늘은 외부 강사 한 분을 모셔 컨설팅도 받았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오후 시간은 졸음이 쏟아지는데 수업마저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찰나 인상 좋은 남자분이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나타나시더니, 본인을 ‘독서문화기획자’라고 소개하였다.
‘독서문화기획자?’
머리를 굴리며 책과 관련한 직업 리스트를 급하게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래도 처음 듣는 단어였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강사 선생님의 이력을 보다가 흥미 있는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이 있어 예전부터 눈도장을 찍어 놓았던 동네 책방의 북클럽 디렉터를 하셨다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력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니 ‘독서문화기획자’는 책을 활용한 다양한 모임과 행사를 기획·운영을 하시고 관련 강의도 하시는 것들을 아우르는 단어인 듯했다.
자기소개를 마치신 후 우리에게 대뜸 질문을 던지셨다. 파워포인트 화면에는 덩그러니 두 문장이 있었다.
어린이는 .... 다.
청소년은 .... 다.
...에 들어갈 말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발표하라고 하셨다. 혹시 나를 시킬까 봐 강사의 눈길을 피하며 열공 모드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대답이 없으니 우리 개발팀 총괄 담당자께서 웃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하셨고, 그 후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쉽지 않은 질문이죠? 강의 내용에 대해 몇 가지 의뢰를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특징이었어요. 고민해 보았는데, 저는 비경쟁식 독서 토론은 개별성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어린이, 청소년 등의 집단 명사는 고정관념을 일으켜 한 사람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문제점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헐~~ 이렇게 신박한 답변이라니!!’
나 같으면 의뢰받은 질문에 대해 어떻게든 정답을 내고자 머리를 쥐어짰을 텐데, 이 선생님은 자신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개성 있는 답변을 해주신 것이다. 호감도가 +10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팁도 주셨는데, 마음에 와닿았다. 유재석, 송은이, 정현무, 신동엽이 각자의 스타일이 있듯이 독서토론 진행자도 그렇게 자신의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수업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진행자의 진정성은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흘러나와 참여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진행 기법보다도 마음 자세가 중요하단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암요. 암요! 이미 선생님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첫 번째 답변부터 저는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나의 색깔대로 하라는 말씀이시죠? 하지만 말이죠, 일단 나만의 생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무엇이 생기더라도 불안한 마음을 극복하고 당당히 드러내는 것도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한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어쨌든 어떤 스킬보다도 진정성에 무게를 두시는 선생님의 의견에는 백번 만 번 동감하네요’
독서 토론 책 선정하는 법, 참여자와 라포 형성하는 법, 논제 뽑는 법 등을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특히 논제 뽑는 법에 대한 설명이 기억이 남아 소개해 보겠다.
논재 뽑는 법을 알려주신다더니, 파워포인트에 웬 산을 찍은 사진 3개가 떡하니 있었다. 논제랑 산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 대해 머리를 굴리던 중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다.
“자~ 세 가지의 산 사진이 보이시죠? 하나는 위에서 큰 숲을 찍은 거죠, 또 하나는 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강 건너 멀리서 산을 찍은 사진입니다. ”
‘저도 눈이 있으니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논제랑 무슨 상관이 있느 지 빨리 본론부터 넘어가 주시죠’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집중했다.
선생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산을 위해서 보는 것처럼 책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질문이 있습니다. 책에 대한 별점과 이유, 책 키워드 뽑아보고 소감 나누기, 주요 인물의 인상과 감상,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문장 나누기, 작품 속 배경(시대, 세계관 등)을에 대해 논제를 뽑아 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산 안으로 즉 책 안으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등 ‘관찰, 대입’을 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왜 제목은 이렇게 지었을까? 등 의도를 파악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에 공감이 갔나요? 공감하기 어려웠나요? ~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나요? 형식으로 선택 판단의 질문도 있을 수 있겠죠.
세 번째 강 건너서 책을 바라보는 것은 책 밖으로 나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겪은 것과 비슷한 경험이 있나요? 책 내용과 관련 사례를 알고 있나요? ~한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같은 경험 사례에 관한 질문과 책 속의 키워드에 대해 나만의 정의를 내려볼까요? 등 개념 정의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라면 어떨 것 같나요?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같이 책의 설정에 다른 아이디어를 더해본다면 ‘상상, 확장’도 가능합니다.”
논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논제 예시는 모두 어디선가 들은 듯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산에 비유한 3가지로 카테고리화하고 설명해 주시는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다시 호감도 +10 상승하는 순간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다만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재가공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신박한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 개발 위원끼리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서로 준비해온 프로그램 주제와 관련 책들을 소개하고 의논하였다. 어린이 팀 간사가 안 나오셔서 갑자기 나한테 진행을 하라고 하셔서 당황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횡설수설에 부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다음 주에 우리 도서관이 주관하는 독서치료 프로그램을 내가 진행해야 하기에 이런 실수도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관하는 도서관 총괄 담당 선생님이 좋은 프로그램 산출에 대한 부담감부터 강사 섭외, 간식 준비, 행정 관련 공문까지 중요한 것부터 소소한 것까지 얼마나 노고가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독서치료 프로그램 개발 담당자로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업무시간을 쪼개어 시간을 내주신 개발 위원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심적 부담감도 있다. 개발 회의를 마치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갑자기 담당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져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가졌습니다”라고 톡을 보냈다. 예전에도 외부 개발 위원을 해보았지만, 바쁜 가운데 다른 도서관까지 출장을 와서 애쓴 나의 수고로움만 생각했지 그것을 주관하는 선생님의 노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이것저것 다양한 역할을 하다 보니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경험한 만큼, 아는 만큼 보이나 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지로 인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니 아찔했다.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한다고 실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