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유혹당할 준비되셨나요?

도서관 책등에 붙어있는 숫자와 문자의 진실

by 라온써니

도서관 책이 집에 있는 책과 다른 점은 책등에 야릇한 문자와 숫자가 조합된 스티커가 붙어있다는 점이다. 저 수수께끼 같은 기호의 이름은 ‘청구기호’라고 하며 책의 위치를 나타내준다. 도서관에 가면 한쪽 벽면에 ‘한국십진분류표 KDC’ 100철학, 200종교, 300사회과학 ... 이 표시된 안내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문헌정보학과에서 당당히 한 과목으로 차지하고 있는 ‘분류’라는 과목은 나에겐 썸 타는 남자의 마음처럼 알 듯 말 듯 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음만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나 혼자 섬을 탄다고 착각을 한 것일까? 결국 ‘C’학점이라는 어이없는 결과가 나에게 주어졌다.


사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할 때도 도저히 정이 붙지 않던 이 이상한 숫자와 문자의 조합은 1년간 담당자로서 일을 해보고서야 김 서린 안경이 일순간 환해 지 듯 내 눈에 쏘옥~ 들어왔다. 그 당시 내가 근무했던 곳은 어린이 전문 도서관으로 독립 건물이 2개, 어린이 자료실만 3개나 되는 규모가 꽤 있는 도서관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1년 동안 새로 들어온 책이 삼만 권이나 되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로 우왕좌왕하게 되는 행사 운영과 달리 혼자 하는 일이라 스트레스는 덜했지만 물밀 듯이 들어오는 많은 책의 양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목과 팔의 통증으로 인해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전전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도서관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았다.


“도서관 책 보면 번호 붙은 스티커 있지? 그거 작업해.”


“캬아~~ 책에 숫자만 붙이면 되는 거야. 진짜 편하겠다.”


“그런데, 나 요즘 맨날 야근이야”


“왜???”


“책 납품하는 담당자가 잠적했어. 연락 두절이야”


최근 도서 정가제로 바뀌기 전에는 입찰을 통해 도서를 구입했다. 풀어서 얘기하면 수서 담당자가 구입할 책 목록을 입찰에 부치면 책 유통 업체가 경쟁하여 최저가 낙찰을 하는 방식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서점의 담당자가 입찰가를 써넣을 때 ‘0’하나를 빼먹는 어이없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낙찰 후 포기하면 1년 동안 입찰 자격이 정지되므로 그대로 책을 납품하기로 결정했단다. 도서관 입장에서는 이천만 원어치 책을 이백만 원으로 산 거니 이런 횡재가 없었다.


하지만 하필 그해 마지막 수서라 회계 상 해가 바뀌기 전에 모든 책을 자료실로 넘겨야 하는 나는 12월 내내 주말도 없이 매일 야근해야 했다. 도서관의 ‘뜻밖의 횡재’가 나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된 것이다. 계약은 성사되었지만 대실수를 저지른 담당자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분은 회사에서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신지...

1년 동안 분류와 사귀어 보니 나랑은 영~ 안 맞았다. 단조롭고 재미없는 면이 싫었다. 어제 오후 2시와 내일 오후 2시가 똑같은 삶을 1년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월 인사발령 때 보직 옮겨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시간의 두께만큼 미운 정이 쌓인 것일까? 요즘에는 도서 유통업자가 분류기호를 포함한 도서정보를 책과 함께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쓸쓸하다. 사람을 고용해서 쓰는 것보다는 돈이 덜 든다는 경제 논리에 의한 거다.


외부에서 도서정보를 사 오는 것과 사서가 도서관에 맞추어 직접 하는 것은 기성복과 맞춤복의 차이와 같다. 나에게 딱 맞는 옷은 시간이 갈수록 편안함과 만족감을 준다. 책에 번호 주는 것은 책의 자리를 정해주는 거다. 폐가제나 작은 도서관이라면 책이 어디에 있던 컴퓨터로 책을 검색하고, 지정한 자리에서 찾을 수 있으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작업이면 문헌정보학과에서 당당히 한 과목을 차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왜 도서관이 오픈 서가인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당초 계획하지 않았던 것들을 잔뜩 사 온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서가에 온 이용자를 주변 책까지 들고 가도록 유혹해야 한다.


처음 업무를 맡았을 때 유혹은 둘째 치고 있어야 할 자리에 맞게 번호를 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린이 자료실만 3개(유아실 1개, 아동실은 주제로 나뉘어 2개) 나 있어서 어느 자료실로 보내야 할지 헷갈렸다. 같은 책이라도 어떤 책은 시리즈로 묶여있고 어떤 것은 단행본으로 꽂혀있다. 시리즈로 더 알려진 책은 시리즈로 따로 자리를 주어야 이용자가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까지 보게 된다.


즉 세계문학전집의 데미안이라도 데미안이 모여 있는 곳에 둘 것인지 아니면 시리즈 자리를 따로 마련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책이 들어올 때마다 이미 비치된 책(전체 장서:이십팔만권)의 일관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일일이 확인을 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즉 책 한 권에 부여되는 번호는 정답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답이 있는 양 기성화 되어 판매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행사 운영 때문에 사서가 없는 사설 도서관에 출장을 자주 나갔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어서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들이 일관성 없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도서정보를 사 오더라도 자관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눈에 띄지 않는 일을 정성 들여 한다는 게 쉬는 일은 아니다. 나도 1년 만에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유혹적인 서가를 만들기 위해 어디선가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을 사서에게 박카스 한 병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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