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고

이해함을 포기한다.

by 라온써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아버지의 임종 전 마지막 설교를 기억한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주여, 저 사람을 도우려 하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던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중


목사님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형(노먼)은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동생(폴)은 도박에 빠져 길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랑하는 가족이 망가져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삶을 포기할 때 내가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생은 '각자도생'이다. 나 자신조차 변화시키기 어려운 데 타인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태를 온전히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게 상대를 배려하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거의 떠났다.

제시마저 떠났다.

하지만 다들 내 마음속에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중


제시는 노먼의 아내다. 동생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가뜨렸으니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제시는 노먼이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의 부류에 속했던 것이다.


어쩌면 노먼이 "나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녀의 영혼을 이해했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만은 그녀를 다 안다"라고 한다면 그게 오히려 그녀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나는 너무 행복해! 내 배우자는 완벽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 옆에는 엄청 참고 있는 상대방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말이다.


아차 하면 사람은 믿고 싶은 데로 믿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다.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이라는 말에는 '그녀를 너무 사랑했고, 그녀를 알고 싶어서 깊게 관찰했고, 결국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받아들인다는 것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이런 점은 양보할 수 없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니가 이상하다'고 상대를 탓하는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예전에 김제동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났다. 기자가 "김제동 씨는 어떻게 다양한 연령,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할 수 있나요?"


"이해하려는 마음을 버리면 됩니다."


나는 당연히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와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에 놀랐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버린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차갑고 냉정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게 애정에 기반한 것이라면 다른 차원일 수 있다. 이해를 포기하는 지점에서 한 발 잘못 디디면 '모든 인간에 대한 냉소'로 흐를 수 있고 또 좋은 쪽으로 나가면 모든 인간을 품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나.


직장 생활에서도 어떤 사람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 아닐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의 마음속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순간 더 싫어진다.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문제다. 하지만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가면 결국 나만 손해다. 물론 내가 이상하도 느끼는 사람들 중에 아주 상종 못할 인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과감히 끊어야겠지만 대체로 나랑 안 맞아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보여지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낙인을 찍지 않고 그냥 '이해할 수 없음'의 모호한 상태로 계속 둘 수 있다면 서로 좋을 것 같다. 이해를 포기하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길로 '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직 그 그릇은 안되니 그 지점에 계속 머무르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 상태까지라도 노력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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