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해도 당황하지 말자
己所不欲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
- 논어
중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황당한 경우가 자주 있다. 직원이 명백한 잘못을 했음에도 절대로,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때다. 급여와 같이 중요한 계산이 틀려도, 이미 끝났어야 하는 일이 몇 주가 지난 후에 시작도 안 됐음을 발견했을 때도, 요청한 사항과 다른 자료를 잘 못 보냈을 때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기 참 쉽지 않다. 내가 황당한 얼굴로 담당 직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 그 직원도 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부득이 나는 먼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물어본다. 돌아오는 대답이 더 당황스럽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뭘"
중국어로 미안하다는 뜻의 두 표현이 있다. 뿌하오이쓰(不好意思)와 뚜이부치(对不起)이다. 둘 다 미안합니다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이 두 표현의 의미는 살짝 다르다. 뿌하오이쓰는 미안하다는 의미보다, ‘제가 폐를 끼쳤습니다’, 또는 ‘폐를 끼치겠습니다’(실례합니다)의 의미가 강하다. 사전에서도 미안하다는 뜻보다는 부끄럽다, 창피하다는 의미가 더 먼저 설명되어 있다. '당신에게 폐를 끼쳤으니 제가 부끄럽고 창피스럽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한국말 중 가장 비슷한 표현은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송구스럽습니다’이다. 전적으로 나의 잘못을 인정한다기보다는 어쨌든 당신에게 피해가 갔으니 내가 부끄럽다는 뜻이다. 반면 뚜이부치对不起는 对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不起 내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뜻으로 정말로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의미를 가진다.
중국에서 살다 보면 뿌하오이쓰라는 말은 들을 수 있어도 뚜이부치란 말은 참 듣기 어렵다. 업무상 실수를 해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쳐도, 식당에서 주문과 다른 음식이 나와도 일단 '뭐, 어때서' 무뚝뚝한 얼굴이, 매너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뿌아오이쓰'라는 (일종의)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할까?
혹자는 이것이 다 이전 문화대혁명의 유산이라 분석한다. 순수한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앞을 다투어 마오쩌둥의 빨간 책을 암기하고, 조금의 잘못이라고 발견하면 바로 인민의 적, 주자파로 분류하여 처단해버리는 광기의 시기를 중국 사람들은 경험했다. 작은 잘못을 침소봉대하여 마녀사냥식 '반동분자' 처벌하는 광기를 경험한 중국 사람들은 이후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나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 옛날의 사건이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변하면 문화도 같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아직까지 중국인들은 사과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여러 번의 문화 충격을 받은 후 나는 직원들에게 사과를 갈구하게 되었다. '제발 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주면 안 되겠니?' 잘못이 있어도 사과 없이 그냥 지나가면 나중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된다는 뜻으로 직원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나의 '강요'에 마지못해 직원들은 명백한 잘못이 있을 때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의도를 이해해줘 고마웠지만 불필요한 강요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일본 경영 컨설턴트 나카지마 다카시는 '리더의 그릇'이라는 책에서 복종을 위복威服, 사복私服, 신복信服으로 나누었다. 위복은 상사가 무섭기 때문에 보이는 순간만 하는 복종이다. 사복은 잘 보이면 출세할 수 있겠다 싶어 복종하는 것이다. 신복은 리더를 존경하여 스스로 따르는 복종이다. 나는 위복, 사복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이전 외국인 친구들이 나에게 왜 한국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부딪쳐도, 발을 밟아도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않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인 친구는 길거리에서 내 어깨가 다른 사람과 강하게 부딪혔는데 왜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을 하지 않고 나는 화를 내지 않냐고 물어봤다. 나는 상대방이 일부러 그러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 굳이 사과를 요구하지도 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미국과 한국의 '사회적 거리'가 다르니 발생하는 차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문화는 상대적이다. 나는 아직도 목욕탕 사우나에서 방금 나온 아저씨가 땀을 닦아내지도 않고 냉탕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세대 차이인가 의식 차이인가 생각을 한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강조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무시되었던 노예의 인권, 차별받던 여성의 지위, 존중받지 못한 장애인의 권리가 더 존중받는 방향으로 사회는 발전한다. 하지만 발전의 속도와 방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 없다.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한국인의 매너에 대해 질문할 때 내가 불쾌했듯이 자존심 강한 중국 사람들은 그러한 외부의 비판을 더 불쾌하게 여긴다. 중국은 중국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의식의 변화 속도는 물적 성장의 속도보다 느리다. 중국 경제는 발전했지만 중국인의 素质소양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했던 내가 만났던 중국 관료의 말이 생각난다. 중국 도로에서 다들 하이빔을 켜고 다니길래 기사에게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잘 보이니까 편하잖아요.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이빔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까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중국 라디오에서 하이빔을 켜지 맙시다 '문명' 캠페인을 듣게 된 건 일 년 후였다. 중국은 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황당하다 느껴지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에 너무 당황하지 말자. 외국에 사는 불편함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화내고 욕한다고 그들이 바뀌지 않는다. 도리어 반발심만 일으킬 뿐이다. 그들이 그들만의 속도와 변할 수 있도록 지켜보자. 굳이 다른 사람 남을 바꾸려 헛되이 노력하지도 말고, 혼자 너무 스트레스받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