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적응과 한국인 정체성 유지 노력을 동시에 해야 하는 주재원
중국어로 일하는 한국 주재원
중국에 여러 외국계 기업이 있다. 미국계 기업 경영층은 미국인이다. 중국 현지 채용인, 중간 관리자들은 경영층과 회의를 할 때 영어를 쓴다. 일본계 기업들은 현지 직원들과 소통할 때 통역을 최대한 활용한다. 유독 한국 기업들은 한국인 경영층이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직원과 소통한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서러움이라기 보다 역시 글로벌화된 한국이라고 이해하자. 그게 맘이 편하다.
중국 현지에 도착한 신임 주재원의 1번 목표는 역시 중국어다. 중국어로 생활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 중국어 능력이 부족하다면 회사에서 통역을 붙여주지만 소통 시간이 두 배가 되고 통역 과정 중 정보 손실도 많다. 통역에 의존할수록 중국어 발전도 없다. 그래서 한국 법인에서는 주재원이 중국어를 배워 직접 중국어로 일하는게 대부분이다.
신조선족
빠른 현지 적응이 중요하다. 그런데 중국어, 중국 문화에 많이 익숙해지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중국식 표현을 사용하고, 중국식 개념을 한국어에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주재원들 사이에서 이런 사람을 우스갯소리로 '신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이제 한국 복귀할 시간이 됐다며 농담을 한다. (한국 주재원보다 중국 문화에 더 익숙한 조선족 교포를 빗댄 말로 절대 조선족 교포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마시라)
(1) 중국식 한국어 표현
주재원들이 중국어를 하다 보면 말은 중국어지만 단어와 내용은 한국어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중국어에 익숙해지면 말은 한국어지만 사용하는 단어는 중국식 단어인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중국에 갓 도착한 한국 사람은 중국 생활을 오래 한 주재원의 표현 방식이 낯설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안배安排
한국어에도 '적절히 안배'하다는 표현이 있지만 중국어 安排는 훨씬 사용 범위도 넓고 빈도도 높다. 중요한 회의 준비를 위해 회의 시간을 적절히 '안배'하고, 회의실을 미리 '안배'해야 하며, 자리도 미리 '안배'해야 한다. 그리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 차량도 미리 '안배'해야 한다. 안배는 준비, 예약, 배치 등 미리 계획하여 준비하는 여러 행동을 통칭한다. 이 표현에 익숙해지면 주재원 간에도 서로 시간/장소/차량 '안배'가 잘됐냐며 확인을 하고는 한다.
긴장紧张
한국어 긴장은 심리적인 상태를 일컫지만 중국어 긴장은 타이트Tight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를 한 시간 내에 끝내기는 '시간이 긴장'하고, 대규모 투자를 지금 하기에는 '자금이 긴장'하다고 표현한다. 한국 사람들이 듣기에는 안배보다 훨씬 더 어색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입에 붙는다면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주동主动
이 직원은 회사가 추진하는 모든 일에 '주동'적으로 참여한다고 표현하는 주재원이 있다면 현지화 성공한 주재원이다. 중국어 '주동'적이라는 표현은 능동적, 자발적이라는 뜻이다. 어떤 일을 이끈다는 한국어 주동과는 다른 뜻이다.
(2) 중국어를 그대로 사용
회사에서 "고객 컴플레인complain 대응을 위한 미팅meeting 시간을 오후에 잡아주세요"와 같이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 생활을 오래 한 주재원들도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중국어, 중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어감이 살아나는 중국 단어를 한국어에 섞어 사용한다.
찌아반加班
찌아반은 정상 근무시간 (보통 오전 9시 ~ 오후 6시) 이외에 추가적으로 근무하는 것을 통칭한다. 평일 저녁 야근, 주말 추가 근무를 모두 찌아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더하기 '찌아'에 일하다 '반'을 합친 말이다. 주재원들 간 "오늘 야근하세요?"보다는 "오늘도 찌아반인가요?"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야근은 밤에 근무한다는 뜻이지만, 찌아반은 정상 시간을 넘겨 근무를 한다는 뜻으로 오버타임 근무를 하는 사람의 심정을 더 잘 표현한다.
링다오领导
"친애하는 영도자 OOO 동지" 북한 방송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링다오는 중국에서 정말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다. 회사 경영층, 고위 관리자, 상사를 링다오로 통칭한다. 모든 회의 시작 전 인사는 항상 "各位领导(모든 지도자 여러분)"로 시작한다. 또한 링다오는 동사로 리더십, 지휘를 뜻하기도 한다. "总经理的领导下(총경리의 지도 아래)"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한국인 경영층을 "한방 링다오"로 통칭하기도 한다. 주재원들이 이런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어에 섞어 사용한다.
(3) 중국식 개념
'올해'의 기준
2022년 1월 기준으로 2022년 12월은 올해인가 내년인가. 올해의 기준을 신정에 두느냐, 구정에 두느냐에 따라 올해가 될 수도 있고 내년이 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올해'의 마지막이 12월 31일인지 구정 전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1월 1일 Happy New Year를 외치고 나서, 구정 설날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한다.
중국은 한국보다 더 구정 설날(춘절)을 기준으로 '올해'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춘절을 어떻게 보내실 거예요"를 "어떻게 올해를 넘기실 거예요(过年)?"라고 표현한다. 춘절에 앞뒤 주말을 붙여 7일을 연속 쉬니 중국이 춘절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춘절 전에 헤어지면서 한국어로 "내년에 봅시다"라고 말하는 주재원이 있다면 중국식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국내, 국산
당연하지만 중국어로 국내, 국산은 중국 내, 중국산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국 생활이 오래된 주재원의 경우 설비 투자 등을 검토할 때 한국어로도 '국내 시장', '국산 설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국 시장, 한국산 설비를 뜻하는가 자세히 들어보면 그게 아니고 중국 시장, 중국산 설비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중국 직원과 대화하고 일하다 보니 은연중 중국식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중국어, 중국 문화에 많이 익숙해지면 나중 한국 복귀 후 다시 한국 사회 적응이 힘들다. 주재원은 현지 부임 시 빠르게 현지 적응을 해야 함과 동시에, 나중 한국 복귀를 위해 한국인 정체성, 문화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두 가지 숙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