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검 Feb 13. 2022

D+37 골프와 주재원

불쌍한 아저씨들은 오늘도 공을 친다

나는 골프를 좋아하지 않는다


역동적이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멋진 팀플레이도 없다. 작은 공을, 작은 구멍에, 몇 번 만에 넣느냐를 두고 경쟁을 하다니.. 참 할 일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동작으로, 채를 바꿔가며 치는데 이게 뭔가 싶다. "이 채로 치면 10야드 더 나가" 장비 자랑을 한다. 나는 그런 무리에 낄 계획이 없었다. 


주말 골프팀으로 초대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한국인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엄마는 학부모 모임이나 교회 성당 모임에서 한국인들끼리 모인다. 남자들은 주말에 골프장에서 집합한다. 


월요일이 되면 이번 주말에는 팀을 어떻게 구성할까 논의가 시작된다. 이렇게 저렇게 위챗이 몇 번 오가고 나면 대략 수요일쯤 주말 팀 구성에 장소 예약까지 마무리된다. 근무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난 나에게도 '오퍼'가 들어온다.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골프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어차피 주말에 할 일도 없고 사람들도 알 겸 위챗 방에 참가신청을 한다. 


바쁜 주재원 생활


주재원들의 노동 강도는 한국 본사 이상이다. 법인의 주요 의사결정은 모두 주재원 몫이고, 본사는 현지법인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슈에 대해 실시간으로 알고 싶어 한다. 본사의 기대치와 현지 현실 사이에 간극을 메우는 것은 모두 주재원의 일이다. 본사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탄탄한 스토리, 정제된 표현, 아름답게 배치된 표와 그림으로 구성된 완벽한 보고서를 요구한다. 하지만 주재원들이 현채인으로부터 받는 자료는 엑셀 원본 데이터, 글로만 작성된 PPT다. 게다가 중국어 → 한국어 번역, 감수까지 해야 한다. 현채인은 오후 5시 땡 하면 집에 가지만, 주재원은 오후 5시 땡 하면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낮에는 회의와 보고 받는 일로 시간을 대부분 허비한다. 


불쌍한 아저씨들의 유일한 놀이 문화


본사의 보고서 채근과 실적 압박, 문제만 던지고 퇴근해버리는 현채인 사이에 오늘도 야근이다. 답답한 마음에 내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어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집에 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황당한 일을 겪은 아내의 말을 듣고, 밀린 아이 숙제를 봐줘야 한다. 끝났다 싶으면 내일을 위해 잘 시간이다.  


대화할 상대를 잃어버린 아저씨들은 공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이 공을 저 구멍에 몇 번만에 넣느냐에 인생의 마지막 남은 열정을 쏟아붓는다. 


"나이스 샷"


오랜만에 칭찬도 들어본다. 얼마 만인가. 상사에게 깨지고, 집에서 구박받던 내가 필드에서는 공 하나 잘 쳤다고 칭찬 받는다. 기분이 좋다. 


골프는 어렵다


골프 공은 티브이에서처럼 탁 치면, 뽕 하고 날아가지 않는다. 보통 탁 치면, 퍽하고 옆 개울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러다가 개울에 쏙 빠지면 좌절감이 몰려온다. 18홀이 끝나면 오늘 공을 얼마나 잘 쳤는지가 '타수'라는 성적표로 나온다. 희한하게도 숫자가 낮을수록 우수한 점수이다. 낮은 성적을 받은 사람은 높은 성적을 우러러본다. 


"오늘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음에는 더 잘 쳐야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다짐을 한다. 


배 불뚝이 아저씨  


주말 골프를 안 치자니 외톨이가 되고, 치자니 성적표가 두렵다. 나 또한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내 자세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문득 어렸을 때 봤던 만화 영화에서 나온 배 불뚝 나온 성격 나쁜 부장님이 생각난다. 부장님은 한 타 줄여보겠다고 사무실에서 홀로 골프 퍼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피식 웃는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그 대머리 아저씨가 쓸쓸하게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D+33 신조선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