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문밖에 서성이는 슬픔을 맞이할 때

한국에세이, 장일호 <슬픔의 방문>

by 책약국

나는 슬픔의 방관자였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_10


책을 몇 장 넘기자마자 동질감을 느꼈다. <슬픔의 방문>을 쓴 장일호 작가는 나와 결이 같은 사람 같았다. 내가 약을 찾듯 책을 찾는 것처럼, 작가는 책 속에서 답을 구하는 이였기에.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슬픔을 외면했다면, 작가는 감당하기 벅찬 슬픔조차 꼿꼿하게 마주하는 이였다.


나는 철저한 슬픔의 방관자였다. 결코 슬픔에 소모되기를 원치 않았다. 슬픔이 찾아들 기색이 보이면 나를 침범할 수 없도록 미리부터 문을 꽁꽁 걸어 잠그며 나의 세계를 지켰다.


그렇기에 건강 문제로 내 삶이 위태로울 때도 태연하게 대학원과 일을 병행하며 살았다. 엄마가 매 순간 나를 안쓰러워하며 새벽 기도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결코 내 안에 슬픔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도 큰 슬픔과 흔들림 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나를 대견해했다. ‘슬픔은 역시 불필요하다’ 여기며.


하지만 바늘에 찔렸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게 정상일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바늘에 찔리면 응당 아픔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듬을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아무 일도 없는 듯 스스로를 위장했다. 나의 슬픔과도 이토록 거리를 두었으니, 타인의 슬픔과는 오죽 거리를 두었을까.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 슬픔이 빚어내는 인간적인 삶에 대하여


장일호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파고든다. 자살 유가족, 성폭력 피해자, 암 환자.. 자신이 짊어진 슬픔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책 안에서 나아갈 길을 찾아 안내한다. 가난, 죽음, 장애 등 우리 사회에 스며든 다양한 슬픔까지 두루 살피며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선명하게 이해하였기에, 타인의 슬픔까지도 자신의 일처럼 공감할 수 있었을 테다.


사실 슬픔을 피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누군가의 고통, 좌절, 아픔을 내 시야에 들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세계를 평온하게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슬픔을 피해 다녔다. 소소하게는 슬픈 책∙드라마를 시작으로, 마땅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뉴스에도 눈길을 주길 꺼렸다.


하지만 어느날 신영복 교수의 <담론>을 읽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그저 관념에 불과한 자신의 사상을 깨닫고, 좁고 어두운 감방에서 연상세계에 사람을 심는 작업에 나선다.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내가 구사하는 일상적 개념의 연상세계는 매우 관념적이었습니다. ‘실업’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경제학 개념이었습니다. ‘빈곤’은 엥겔계수가 연상되었습니다. 메마른 이론과 개념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생각이란 얼마나 창백한 것인가. 창백한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상된 사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_<담론>, 신영복


‘실업’이라는 단어의 연상세계에 사람을 심기로 했습니다. 내가 잘 아는 실업자 친구의 얼굴을 연상세계에 앉히는 작업입니다. 온종일 행상과 막노동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 갔던 그를 실업의 연상세계에 심으려 했습니다. ‘실업’이란 단어와 그 친구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면 나의 생각 자체가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이 될 듯했습니다._<담론>, 신영복


‘메마른 이론과 개념에 뒷받침된 생각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내가 대학병원을 오고 다녔던 시간들이 겹쳐졌다.


진료실에서 나의 몸 상태보다 때로 더 아프게 와닿는 건 의사들의 무심한 태도와 말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 아닌 고장 난 기계 또는 실험체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부품이 못 버틴다면 언제고 수리하면 되는 그저 망가진 기계. 문득 나 역시 그들처럼 무정한 태도로 이 세상과 사람을 대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슬픔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만큼 온전히 누군가의 아픔을 포용하기엔 한계가 있었을테다.


<슬픔의 방문>에서는 의사이기 이전에 손님이고자 한 양창모 의사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는 왕진을 통해 환자의 삶과 일상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자신을 놓아 보는 경험을 한다.


환자를 ‘증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건 수없이 환자 집 문턱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거기에는 ‘한 사람’이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 그는 자기 삶의 맥락 속에 앉아 있으므로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_<슬픔의 방문>, 236


슬픔은 단순히 소모적인 감정이 아닌, 타인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에서 비롯된 진정 어린 공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머릿속 실체 없는 관념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과 풍경이 있었다.


처음 신영복 교수의 글을 볼 때는 기약 없는 옥중 생활에서 타인의 삶까지 품고자 한 그 마음이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도 버거울 상황에 타인의 슬픔까지 보듬고자 한 장일호 작가의 마음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슬픔이 단지 누군가의 고통∙아픔을 불러들이는 것만이 아닌,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숭고한 애정의 발현이라는 것을. 그저 나를 소모시키는 버거운 감정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_<담론>, 신영복


나는 긴 시간을 슬픔의 방관자로 살아왔다.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하루 아침에 누군가의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 단지 소모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나와 타인의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서로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됐기에.


마음의 문 바깥에서 서성이던 슬픔을 적어도 매몰차게 외면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찾아든 슬픔을 맞이할 때다.


상처받는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곤 했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남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슬픔과 나란히 앉는다._251



책처방

1. 이 책이 필요할 때

- 슬픔을 피하지 않고 맞서길 원할 때.

- 때때로 삶을 덮쳐오는 슬픔과 불행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면.

- 책을 통해 슬픔에서 삶을 건져낸 이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2. 책처방

- 슬픔은 단순히 소모적인 감정이 아니다. 슬픔을 오롯이 느낀다는 건, 나와 타인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보고 공감한다는 것. 애정어린 관심과 사랑으로 나와 타인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슬픔을 마주하고 이를 다독이는 법을 배울 때 삶의 아픔 또한 치유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타인의 삶을 다양하게 들여다보며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은 우리가 슬픔을 다독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글귀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_84~85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_91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