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채는 것도 사랑이라

한국에세이,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by 책약국

무채색 사랑의 발견


한 해를 매듭짓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초에는 유독 따뜻한 감성의 책들을 찾아 헤맨다. 지난 한 해 여러모로 살얼음 위를 걸었을 마음에게 주는 포상 휴가 같은 의식. 전기장판에 누우면 그 따뜻함에 피로가 녹아내리듯, 내 마음도 온기 가득한 글에 기대 푹 쉴 수 있기를 바라곤 한다.


그런 면에서 고명재 작가<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는 한 해가 저무는 시린 겨울에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책이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일지라도 마음만은 따뜻하게 덥혀줄 것 같은 문장들. 맑고 투명한 언어로 그려낸 사랑의 풍경 속을 거닐다 보면 내 마음에도 자연스레 사랑이 깃든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_14


작가의 시선에 나의 눈높이를 맞추니, 일상에 치여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던 사랑을 곳곳에서 다시 발견하게 된다. 매일 같이 밥상에 올라오는 쌀알에서도, 아삭아삭 씹히는 무에서도, 제빵사가 수없이 반죽을 치대 만들었을 빵에서도.


내가 화려한 광휘에 시선을 빼앗겨 다른 곳만 바라볼 때도, 묵묵히 나의 일상을 지탱해 준 무채색 사랑의 흔적들. 나의 세상을 색색으로 물들이고자 모든 것을 내어주고 무채색이 되어버리고 만 이들의 존재를 다시금 실감한다.


가끔, 스님은 연락도 없이 과일을 한 박스씩 보내곤 했다. 뜬금없이 집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릴 때 나는 아름다운 그 금빛을 모조리 기억하려다 그런 색채마저 거두는 게 사랑이라 고쳐 믿었다._14


잔뜩 마음의 날을 곤두세우게 되는 일이 많은 요즘. 늘 햇볕처럼 따스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사랑에 다시금 눈뜨게 만드는 이러한 책이 참 귀하게 느껴진다.



미숙한 나를 알아챈 사랑들


사람은 대개 변하지 않는 사랑을 꿈꾼다. 늘 함께하며 나의 흠집까지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때로 바로 곁에 있음에도, 산소처럼 너무 익숙해 알아챌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 사랑이 사라진 순간에야 절감할 뿐이다. 내가 받고 있던 사랑이 나를 편안히 숨 쉬게 했음을. 그건 가족의 사랑일 수도, 때로는 가족보다 많은 일상을 함께하는 직장 동료의 배려일 수도 있다.


늘 나의 미숙함을 먼저 알아채고 메꿔주어 내가 부족한지도 모르게 날 감싸주던 이들. 늘 자연스럽게 존재해 오히려 그 크기를 알 수 없던 나의 사랑들.


책은 섬세한 언어로 그러한 사랑들에 형체와 존재감을 부여한다. 내가 색색으로 빛날 수 있도록 기꺼이 무채색 배경이 되어준 이들에 대하여. 심장이 뛰게 하진 않더라도, 언제나 안정된 박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감싸준 사랑에 대하여 말이다.


반드시 요동치고 심장 뛰고 들썩여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존재를 아래에서부터 떠받친 채로 기둥처럼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사시사철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 은은한 지속, 그 기쁨. 놀라운 세계. 창호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만물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거기 있구나._113



알아채는 순간, 깊어지는 사랑


어릴 때도 그랬지. 나는 내 슬픔만 보느라 나를 감싼 주변의 사랑을 보지 못했지._12~13


때로는 자그마한 상처에 눈이 멀어 내가 받아온 수많은 사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어릴 때 엄마의 손을 잡으려다 뿌리쳐졌던 기억. 그 강렬한 찰나의 순간에 갇혀, 지금까지도 엄마가 슬며시 손을 잡거나 팔짱을 껴오면 불편함을 느꼈다. 그 한순간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나의 다정한 온기를 필요로 하며 손 내미는 엄마를 애써 모른 체하곤 했다. ‘그때는 손도 잘 안 잡아줬으면서 왜 이제야?’ 하는 못난 마음이었다.


책을 읽은 뒤, 다 커서도 아직 엄마의 사랑 안에 둘러싸여 있던 나를 알아채고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바뀌어 있는 이불의 두께들. 여름에 강아지도 아닌 내게 더우면 껴안고 자라며, 페트병에 물을 담아 얼린 뒤 수건에 감싸 건네던 엄마. 겨울이면 방이 건조할까 책상과 책장 위, 침대맡에 하나, 둘 생겨나는 물그릇. 겨울의 하루 끝, 방에 들어가면 이미 따뜻해져 있는 전기장판.


매일 같이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 엄마의 사랑으로 이렇게 섬세하고 촘촘하게 메꿔져 있었는데. 나는 그 한순간의 서운함 때문에 따스한 사랑의 순간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나의 아늑한 일상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아닌 엄마의 섬세한 보살핌과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요즘에는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어색함과 불편함에 로봇처럼 뚝딱거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온기를 나누고자 한다. 언젠가 나도 엄마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받아온 그 모든 사랑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를 둘러싼 사랑에 눈뜬 순간, 나의 미숙한 사랑은 더욱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책처방

1. 이 책이 필요할 때
- 나를 감싸고 있는 사랑을 찬찬히 되새겨보고 싶을 때
- 맑고 투명한 사랑의 언어에 빠져들고 싶을 때
- 마음이 복잡해서, 무해하고 따뜻한 감성의 책을 읽고 싶을 때

2. 처방문
- 어느 날 문득 외로움이 든다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자. 끼니마다 상 위에 올라오는 따뜻한 밥과 반찬, 내가 귀가할 때까지 꺼지지 않는 집안의 불빛, 연락이 조금만 뜸해도 걸려오는 걱정 가득한 전화, 일이 지쳐있을 때 슬며시 카톡이나 간식으로 위안을 건네는 직장 동료.. 그 모든 것 안에 나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담겨 있다. 뜨겁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나의 일상을 촘촘히 받쳐주고 있는 무채색 사랑에 눈뜬다면 내 삶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글귀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_14
가끔, 스님은 연락도 없이 과일을 한 박스씩 보내곤 했다. 뜬금없이 집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릴 때 나는 아름다운 그 금빛을 모조리 기억하려다 그런 색채마저 거두는 게 사랑이라 고쳐 믿었다._14
어떤 대상을 미세하게 다룰 줄 안다면 그건 사랑도 섬세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루약은 섬세한 배려. 약절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 그들을 위해 콩콩 약을 빻는 사람들. 백사장보다 고운 세계를 너에게 줄게. 더 작아지자. 미미해지자. 얼른 녹아서 몸속으로 잠 속으로 사해로 퍼지자._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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