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변명)
소리 내면 그 순간 휘발되어버리고 마는 말과는 달리, 어딘가에 기어코 살아남은 단어들로 뿌리를 내려버리는 글을 쓴다는 게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열리지도 않을 인생 청문회에서 내가 쓴 글이 증거자료로 제출되어 내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진실되게 살았는지 물어볼 것만 같은 그런 생각도 가끔 들고. 어쩐지 글을 남긴다는 건 불안하고 엄청난 일이라서 지금까지의 숙제를 미뤄온 게 아닐까 싶은데, 아직도 이유를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반 학생들의 글쓰기를 검사할 자격을 스스로 얻고자, 내 글쓰기 숙제를 기어코 미루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인생 속 널려있는 작은 숙제들 중 하나를 마주 보기로 했다. 쓰기만 해도 글쓰기 선생님은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시겠지. 일단 쓰자.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멜로 따위는 인생에 들이지 않는 게 살기에 편하다. 빈 몸으로 와서 회색 가루로 돌아가는 게 삶인데, 타인의 마음까지 얻으려 애썼던 이십 대의 내가 그저 짠하다. 자기 연민은 하지 않는 게 좋다지만, 지난 사랑에서만큼은 그게 안된다. 씹어도 씹어도 단물이 자꾸 나오는 껌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실행 취소' 버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소 눈을 하고선 지난 연애를 여물 삼아 되새김질하다 보면 어느새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곤 하는 것이다. 사라진 시간을 가엾게 여기는 게 겨우 취미가 되어버리다니. 한심하다.
여느 연인의 시작이 그렇듯, 우리가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의 운명이었다. 스물일곱 살의 나는 마침 유희열의 만개한 미소에 빠져 있었다. 흔한 취향은 아니다. 이동진 평론가 님이 별 5개를 준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도 봤다. 곧 인생 첫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시기라, 한여름 여행지에서의 판타지 같은 로맨스도 꿈꾸게 되었다. 영화 주연이었던 김새벽 배우님의 "여행 잘 다녀오세요" 응원 사인까지 일기장에 받았으니 이제 여행지에서 로맨스만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여행 중 동행과 머무르게 된 런던 코벤트가든. 마침 유희열을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유희열이 좋은 거였지, 이상형으로 좋아하던 것은 아니어서 헷갈렸다. 키가 크지 않고, 하얗지 않고, 피곤해 보이고, 듬직하지 않은. 한마디로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아주 먼 그를 보면 왜 웃음이 나는가? 고민해서 내린 결론은 그의 생김새가 유희열을 닮아서 재미있기 때문에, 그리고 조금은 귀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였다. 언젠가 한번 내게 "키가 몇이에요?"라고 묻기에 "169cm 좀 넘어요. 그건 왜요?"라고 물으니, "00 씨 키에 따라 제 키가 달라질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귀여워 보였다. 상대가 귀여워 보이면 그 연애는 아무도 말릴 수 없게 된다. 유효기간 3년의 멜로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글을 어떻게 더 완성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중에, 예전 수업 자료를 찾느라 오래된 노트북을 부팅했다. 그와 헤어지고 사진 정리를 한 후에, 한 번도 켜본 적이 없었다. 3년 동안의 사진들이 다시 살아나 있었다. 귀찮게도 사진 정리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찍은 사진, 제주도에서 귤 따는 사진, 태국 빠이에서 새해를 맞는 사진, 치앙마이에서 오토바이 기름을 넣는 사진, 홍콩에서 커플 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는 사진,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촬영지였던 일본 고조 시 여행을 계획하고 같이 가주었던 사진도 함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시간 속 우리가 반짝반짝 빛났고, 행복해 보였다. 사랑은 사랑이었다. 그때의 우리만 할 수 있던 풋풋하고 설레는 사랑. 그래서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짓기로 했다. 그 시절 우린 만나길 잘했고, 서로 노력했고,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헤어졌을 거라고. 헤어진 건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덕분에 행복했어. 너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 해피 유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