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 현상이 덮친 4월 중순의 봄엔 여러 종류의 꽃이 동시다발적으로 피었더랬다. 하나씩 개화해도 보기 싫은 꽃들이 다발들로 온 사방에 화려하게도 피어있어서 이번 봄엔 아주 곤란을 겪었다. 하필 꽃나무는 내가 가는 길마다 심어져 있어서 꽃을 보지 않는 데에는 기어코 방심하지 않는 주의력이 필요했다. 쓰레기봉투 묶음을 사러 편의점을 가는 중에도, 풋살 수업을 들으러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도, 묵은 냄새를 지우려 빨래방에 이불을 지고 가는 중에도 꽃들은 무심코 그 존재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꽃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기다 보면 꽃구경을 온 커플들의 하트 시그널까지 넋 놓고 구경하게 되었고, 그러다 시선의 종착지는 무릎이 나온 운동복을 입고 슬리퍼를 끌고 있는 허름한 내 행색이 되었다. 자신의 초라함을 실감하며 눈앞의 커플과 눈이 마주칠 것 같을 땐 르세라핌 뮤비를 보며 익혀둔 축지법을 쓰면서 광속으로 얼른 집에 들어가야 했다. 감쪽같이 집에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전신거울에 비친 나를 발견하고는 흡사 햇빛을 본 바퀴벌레가 된 카프카적 기분을 느꼈다. 다음 며칠간은 칩거해야지, 결심했던 지난 육십일.
물론 사람이든 꽃이든 무언가를 혼을 빼며 구경하는 계절은 끝나기 마련이기에, 기후 이상으로 인한 여름의 이른 시작을 온몸으로 반기던 와중이었다. 현생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럴 일은 희박하겠지만 혹시나 졸도할 수도 있는 저를 번뜩 업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야 하고요. 에어가 들어간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제 키에 놀라지 않아야 하고요. 자기 일도 열심히 하구요. 무엇보다도 웃는 모습이 <연애남매>의 ‘정섭’처럼 해사해야 합니다.]
소개받기 전에 주선자에게 부탁했던 말들이다. 청유형, 권유형은 일절 쓰지 않고 코딩 명령어를 쓰듯 단호하게 말씀드렸더랬다. 그런데, 진짜 그런 듬직한 쿼카 같은 사람이 눈앞에 둥- 나타났다. 이 사람의 등장으로 봄의 성선설을 긍정하게 되면서, 맞아, 봄이 참 아름다운 계절이었지, 혼자 중얼거리게 된 것이다.
이윽고 우리는 이제 막 마음을 틔운 사이가 되었고, 함께 바라볼 곳이 필요해졌다. 시선을 둘 곳으로는 곧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이 있는 꽃나무가 제격이었다. 시기상 늦봄이어도 봄은 봄이니까. 일부러 그늘진 곳에서 창밖도 보지 않고 집에만 있던 사람 둘이서, 햇빛을 덜 받아 아직 만개하지 않은 꽃나무를 바라보다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손을 잡고 밤길을 걷다가 꽃을 보다가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자라나기도 했던 그 봄밤엔 서로의 눈을 처음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이내 한참을 다시 눈을 마주쳤다가 또 피하고. 그러다 다시 바라본 서로의 눈동자에는 우리가 피어 있었다. 낯설고 예쁜 서로를 구경하고, 그러다 기특하게도 아직 떨어지지 않고 나무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꽃잎을 달빛에 비추어 헤아리는 밤. 함께라면 모든 계절의 밤이 그 쓸모가 사라져도 좋을 봄밤일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눈을 감았다가도, 혹시나 무언가가 입술에 닿진 않을까 얼른 눈을 떴다. 그렇게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 대신 눈을 맞추었던 밤밤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