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 님의 노래를 들으며
빗방울이 창문에 송알송알 맺히는 월요일. 간만의 평일인 휴일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이번 부국제 락페에서의 예린 님 공연을 삼성 SERIF TV에 크게 틀어놓았다. 개천절 의식을 치르는 기분도 들었다. 무드에 잔뜩 취해있다 문득 노래 제목과 가사가 귀에 박혀왔다.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줄게, 라니. 지난 토요일에 다녀온 넷플연가 모임이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고 ‘미래의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던지라 더 관심이 갔다. 가사가 영어였기에 자세히는 안 들려서 가사를 찾아봤는데, 해석이 와닿지는 않아서 내 말투로 적어보기로 했다. 가사 단락마다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있었다. 그 기억들을 과거로부터 하나씩 꺼내보며 미래의 가족을 정의 내리는 것. 이렇게 나만의 개천절 의식을 치러보기로 했다. 단군왕검님이 보시면 웬 생뚱맞은 의식이냐 하시겠지만.
papa, when you feel so bad
아빠 기분 안 좋을 땐
just turn around from the ages that passed away
지나간 생각 좀 그만해요
mama's cookies are always on the table
상 위에 늘상 있는 과자
we'll feel much better, after just a bite
한 입 들어요, 기분이 좀 좋아질 거예요.
아주 어릴 땐 아빠를 좋아했다. 엄마한테 혼날 때면 아빠 무릎에 숨기 바빴다. 아빠한테는 늘 알코올 냄새가 났다. 술을 마셨거나, 전날 마신 술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였다. 이 세상 아빠들한테서는 당연히 나는 냄새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서 난 알코올 냄새가 나면 아빠가 내 근처에 왔다는 걸 알아차리곤 했다. 달려가서 아빠에게 안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나는 아빠를 닮았다. 어쩌면 아빠의 mbti도 INTJ가 아닐까 생각한다. 외국어를 공부하고, 여행 계획을 짜면서 행복해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내 모습을 가만 거울에 비추어보면 아빠가 보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빠는 쿠키 대신 술로 기분을 달랬으니까. 타임머신 같은 게 있어서 아빠의 어린 시절에 내가 갈 수 있다면, 그래서 술 대신 다른 방법을 알려줄 수 있었다면 아빠는 적어도 나만큼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기분이 좋아졌을까. 덜 혼자였을까.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아빠와 아들이 함께 탁구를 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방금 잃은 사람처럼 꺽꺽 소리 내어 운다. 아빠를 닮은 얼굴로 다가가서 어린 시절의 아빠를 달래주고 싶어서. 어쩌면 그때로부터 30년 정도 지났을 때, 우리도 함께 눈을 맞추고 탁구 따위를 웃으며 칠 수 있게 될까.
I was always so alone and young
어릴 때 난 늘 외로웠어요
now I am grown but the same, I've got no one
다 큰 지금도 역시 외로워요
I could use my eyes to make some friends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만
but I always wanted to come home to my family
가족이 있는 집에 가고 싶을 뿐
어릴 때도 지금도 나는 외롭다. 가끔은 나와 닮은 아빠와 잔을 기울이며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면 이 외로움이 털어질까 상상해본다. 아빠는 멋쩍게 웃으면서 그저 술을 따라주겠지. 맛없는 아빠표 김치찌개나 어죽 같은 걸 끓여주겠지. 요즘은 캠핑이 유행이니까 낡은 텐트 따위에서 낚싯대를 나란히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골든벨 퀴즈를 맞히는 게 우리 둘의 이벤트였으니까, 어쩌면 함께 TV 퀴즈쇼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 일을 떠올리는 건 마치 헤어진 연인과 함께할 수 있었을 일들의 가능성을 헤아려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준 고통은 떠올리기만 해도 사무치게 아파서 여기에 쓸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새에 나이를 먹고. 이제는 누가 있었던가,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는. 눈을 두꺼비처럼 꿈뻑꿈뻑거리는, 그저 기억을 잘 지우는 어른이 되었다.
baby, my love, my butterflies
안녕 내 사랑
remember I'll always be on your side and
난 항상 네 편인 거 알지
I'm your friend, I'm your world's best hugger
난 네 친구야, 완전 따숩게 안아줄게
remember I'll always say good night to you
잘 자라고 늘 말해줄 거야
you were always so alone in them
넌 언제나 혼자였지
now we are grown but the same, I still need you
우리 다 컸는데도, 난 네가 필요해
I could use my love to be your friend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it's awful!) but I'll be your family
어유 겨우 그게 뭐람, 기꺼이 가족이 되어주고 싶은걸
baby, when you feel so sad
네가 눈물 나게 슬플 때
just reminisce 'bout how great our last summer was
우리의 디따 멋졌던 여름을 기억해봐
know we went through a lot of things
많은 걸 같이 겪어온 시간
but we could do better, better together
우린 함께이기에 더 잘될 거야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사랑을 느낄 만큼 꼭 안아주고, 사랑하는 이가 단꿈을 꾸기를 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내 열망만큼 퍼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넉넉한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될까. 혹시나 바닥이 드러날까, 가난하고 빈곤한 이 마음에 상대가 초라함을 느낄까 봐, 미리 겁을 먹고 행복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게 될까.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은데. 친구도 되어주고 기꺼이 가족도 되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가득한데도. 나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어설픈 흉내를 낸다. 나에게 사랑을 기꺼이 주는 사람들로부터 하나씩 배우고 그걸 따라 한다. 난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까. 어른이니까. 아빠와 함께했던 슬픈 여름보다, 엄마, 동생과, 친구들과, 연인과 함께했던 행복한 여름이 더 많이 쌓였으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아빠에게 가서 해주고 싶었을 일들을, 지금의 나에게 하나씩 해본다. 그러다 보면, 어떤 기억들과도 화해가 되겠지.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