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왔다 율무

왔다, 율무

by bookphoto

나의 반려묘가 되어줄 율무가 오기로 한 날 아침, 눈이 번뜩 떠졌다.

‘디데이다.’


새벽 늦게까지 방묘창을 설치하다 잤더니 어찌나 몸이 찌뿌둥하던지. 두꺼운 양파망 같이 생긴 방묘망을 커튼봉에 케이블 타이로 묶어서 설치하려는 게 계획이었는데, 돌돌 말린 상태로 배송이 되어서 쭉 펴서 창문 크기에 맞게 방묘창을 설치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1차 설치 때에는 창 크기에 비해 턱없이 짧은 길이로 재단해버려 걍 셀프 시공은 관두고 전문가에게 의뢰할까도 생각했지만, 2차로 설치할 분량의 방묘 양파망이 다행히도 남아있어서 새벽 2시까지 만들어서 설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두꺼운 재질의 방묘창을 가위로 자르다가 여러 군데 손이 베이기는 했지만도. 아직 고양이는 오지도 않았는데 오른손 여기저기에 고양이에 할퀴어진 듯한 자국이 남았다. 그래도 이리저리 혼자 씨름하며 설치한 방묘창을 보니 국밥 한 그릇 해치웠을 때마냥 마음이 든든했다.


출근 전 마지막 체크. 가만 보자. 숨숨집도 4개나 있으니 율무가 이동장에서 나와 당장 들어갈 공간도 충분하고, 헤어볼 관리와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캣그라스(고양이가 좋아하는 풀)도 뿌리째로 그릇에 담아두었고. 또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발톱을 세워 박박 긁으면서 이를 풀어줄 스크래쳐도 2개 배치해 뒀다. 높낮이를 조절해서 섭취할 수 있는 물그릇과 밥그릇도 두었고. 사냥놀이를 하거나 몸을 숨기고 싶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숨숨터널도 사두었다. 각종 간식에 건식 사료 및 주식캔도 구비해 두었으니. 이 정도면 월급쟁이 집사로선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캣타워와 캣휠은 주문제작이라 5월 초에나 배송된다고 해서 좀 아쉽긴 했다. 율무가 왔을 때 ‘율무 테마파크’를 딱 개장했어야 했는데. 초장에 배부를 순 없으니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놓는 것도 어쩌면 행복을 예약해 두는 것일지도. 장기투숙객 only 이벤트 같은 거라고 생각해야지. 실은 방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자그마한 집이지만 그래도 차로 네 시간을 달려온 율무의 마음에 쏙 들길 바라며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캣닢 가루를 여기저기 뿌려두는 것으로 아침 의식을 마쳤다. 출근길 발이 안 떨어졌다.


가족행사라고 반차를 쓰고 두 시간 일찍 일터에서 나왔다. 임보자님과 그의 동료 분들이 드실 파이와 음료를 근처 맛집에서 사 와서 작은 상을 차렸다. 땀이 났다. 네 시간이나 운전해서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역이셨을지. 그렇게 멀리서 오셨는데 우리 집이 실망스럽거나 내가 미덥지 않으면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이 파이와 음료가 작은 뇌물이 되길. 그러고는 집 이곳저곳을 미어캣처럼 재차 살폈다. 당장 치운다고 집이 뭐 크게 달라지겠냐마는. 고양이가 입에 삼키면 안 되는 물질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지는 않나, 아참, 고양이가 인공 향을 싫어한다고 했지. 디퓨저도 치우고. 운전자 역할을 하신 분이 앉으실 방석도 꺼내어 손님맞이 준비를 했다. 드디어 근처에 도착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가슴이 두근, 아니 쿵쾅쿵쾅거렸다. 내가 괜한 호기를 부린 건 아니겠지. 고양이 한 마리의 행복을, 그 존재의 크기를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부담감에 먹구름이 몰려왔지만 강풍의 긍정 바람으로 훠이훠이 불안감을 쫓아내고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딩동-”

드디어! 왔다, 율무.

담요로 똘똘 감싼 이동장을 들고 계신 임보자님을 처음 마주했다. 조용히 인사를 건네시는 모습에서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딜 율무를 진정시키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냥이인 걸 알았죠.“

고양이 이동장이 열리자 캣워크가 시작됐다. 마치 영화 <관상>에서 위엄을 떨친 이정재의 등장 씬처럼 율무는 사자 같은 기세로 위풍당당한 걸음을 선보였다. 보통 낯선 곳에 오면 고양이들은 숨는 게 기본이라던데. 율무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우리 집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그러고는 고양이 모래화장실에 가서 모래에 온몸을 누이고는 뒹굴뒹굴거렸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며 임보자 님께서 모래를 어디서 산 건지 물어보셨다. 율무는 이따금 나에게 와서 몸을 은근슬쩍 비비며 인사를 나누고 가기도 했다. 율무의 재산 1호인 집에도, 스크래쳐에도, 숨숨집에도. 얼굴을 부비며 자기의 냄새를 묻혔다. 이 집이 꽤나 맘에 들었나 보다.


율무가 공간을 탐색하며 주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우는 동안 임보자님과 티타임을 가졌다. 율무의 역사 강론을 듣는 시간. 율무는 지난 추운 겨울에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그중 하나는 먼저 고양이별로 떠났다고. 다른 아이들은 다행히 다 입양처를 구했단다. 임보자님께선 율무가 이 집, 그리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다. 그동안 많은 구조 및 임보를 해오셨지만 이번처럼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지신 건 처음이랬다. 입양자의 집에 고양이들을 내려놓아주고 급히 나오신 적이 많단다. 고양이 앞에서 임보자와 입양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친근하게 지내는 것을 보여주면 고양이가 더 안심할 거라며. 그저 감사하다고 했다. 가족이 생기는 자리에서 티타임은 필수 아닌가. 새 사람을 집에 들일 때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티타임이었겠지만 율무에겐 그동안 자기 가족을 돌봐준 임보자님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었을지도. 내 냄새로 가득한 새 영역에 들어왔을 때부터 율무는 이별을 준비했을 테다. 암튼 그렇게 율무가 진짜 왔다. 율무는 다행히 잘 적응해가고 있다. 율무 적응기는 다음 편에서! 아 참, 율무 인스타도 있다. @yulmu4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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