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왔다 율무

안심하시길 바라요

나와 고양이의 시간

by bookphoto

첫날 율무는 잘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마련해 놓은 숨숨집이 무색하게 숨지 않고 방 여기저기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가오는 새벽부터였다.

“(낮은 톤으로) 아웅~아우웅~”

여린 몸으로 낳아 다섯 달간 기르고 함께 지냈던 새끼를 찾는 건지, 그동안 자신을 돌봐줬던 임보자(임시보호자) B님을 찾는 건지, 그리 구슬프게 울 수가 없었다. 급히 고양이 번역기 어플을 설치했다. 무료 버전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 번역을 위해 광고를 시청하라고 했다. 아니, 고양이가 저렇게 서럽게 우는데, 울음 한 번마다 광고를 하나씩 보라니. 평소 루미큐브를 하며 보곤 했던 겨우 그 15초의 짧은 광고가 당장 초조한 나에게는 너무나 길었다. 번역기 어플이라는 거 어쩌면 그저 우는 고양이 달래려는 마음을 이용하는 상술일 수도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광고가 없는 유료 버전을 결제했다. 비몽사몽 간에 결제를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율무의 울음이 몇 개 지나가버렸다. 그 울음들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다음부터 번역기를 거쳐 내게 전달된 율무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새벽 03:14] 내 사랑, 날 찾아봐요!

[새벽 03:14] 특별한 사랑을 찾고 있어요

[새벽 03:14] 내 사랑, 내 목소리가 들리세요?

[새벽 03:15] 내 사랑을 찾고 있어요

[새벽 03:18] 사랑받고 싶어요

[새벽 03:19] 나를 사랑해 주세요

[새벽 03:19] 안심하시길 바라요!


율무가 보낸 이 울음소리의 수신자는 누구인지 알 것만도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율무야 네가 보낸 울음이 생강이(율무의 새끼)와 B님에게 바로 가닿기에는 네가 참 멀리 왔어. 내가 널 여기 먼 곳에 데려오고 싶다고 했어. 미안해. 잘해줄게. 이제 내가 너의 사랑이 되어줄게.'

이 말을 고양이 울음으로 율무에게 대답하려면 나는 어떻게 울어야 할까. 나는 고양이처럼 울 줄을 몰라서 고양이 커뮤니티에 올라온 대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밤엔 울어도 모른 척 하기. 울 때마다 대답을 해주거나 간식을 주면 우는 행동이 더 강화된다고 하니. 혹시나 집 구석구석에 자신의 가족이 있을지도 몰라 배회하는 율무의 울음을 모른 체하고 나는 꿋꿋이 자는 척을 했다. 해가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햇빛이 들어오는 아침이 되어서야 율무가 잠자리에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심하시길 바란다'는 마지막 울음이 떠올라 마음이 찌르르 아파왔다. 정작 율무 스스로는 안심하고 있었을까. 괜히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이 번역기 내용은 B님에게도 보내드렸다. 사실 율무는 요 며칠 밤 B님과 생강이를 떠올리고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고. 생각보단 잘 지내지만 생각보단 그리워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밤마다 울음소리가 커지는 율무였다고.


목요일에 율무를 만나고, 이튿날 일터를 다녀와 집에 가자마자 눈으로 율무를 찾았다. 보이는 곳에 율무가 없었다. 밥도 물도 안 먹었네. 어디 갔을까.. 찾던 중, 내가 집을 비운 시간만큼 고양이는 나와 다시 멀어진 건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화장실 구석에 숨어 있는 흰 양말에 너구리 꼬리를 한 율무가 보였다. 첫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집 곳곳을 탐색하던 율무 맞나?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율무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나와 한 공간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괜히 서운했다. 난 열흘을 너를 만나려고 자는 동안에도 네 꿈을 꾸고 널 위한 많은 것들을 집에 들여놓았는데. 내 반가움이 전해지지 않은 걸까. 첫날 보여준 의연함은 어쩌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와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씻었다. 어서 고양이의 마음을 달래주고 율무와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었다. 낚싯대를 꺼내 살풀이를 하는 사람처럼 온몸으로 사냥놀이를 했다. 율무의 한이 풀어졌으면, 그래서 어서 나와 재밌게 놀고 스트레스도 풀었으면 좋겠어요. 소원하는 마음으로 격렬하게 율무와 놀았다. 사냥놀이를 하고 허기짐을 채운 후의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밤이 더해질 때마다 율무의 울음은 차츰 줄어들어가고 있다.


이제 율무는 내가 퇴근을 하고 집에 가면 배를 보이며 발라당 누워 두둠칫 둠칫 리듬을 탄다. 옆으로도 구르고 꼬리도 부르르 떨며 내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배를 보이는 것은 무한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고, '꼬리 부르르'는 "우리 집사 캡숑짱 좋!아!!"의 의미를 표현하는 거라고 하니. 우리 만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거 진도가 참 빠른 거 아니요, 율무냥. 강아지 대하듯 나도 모르게 배를 보이는 율무의 배를 만지려다 냥냥펀치 한 대를 맞은 적도 있지만, 이제는 고양이 유튜브로 배워 그 의미를 안다. "내 배를 보는 건 되지만, 만지지 마라옹. 때릴 거다냥." 고양이는 참 알 수 없다. 어쨌든 '할까 말까 헷갈릴 때에는 일단 하고 후회하자!'가 내 인생 모토였는데, '할까 말까 헷갈릴 때에는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는 새로운 모토가 생겼다. 퇴근 후 격렬히 반겨주는 율무의 인사 모드는 오래가지 않는다. 곧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율무다. 그렇게 율무를 알아가는 요즘. 어젯밤에는 율무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오늘 출근할 때 좀 째려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우리 이제 겨우 13일째. 하루하루 우리의 시간이 쌓여가는 이 기분,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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