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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Nov 30. 2015

[서평] 누구나 한 때는 문학도였다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 휴머니스트, 2015

낙엽지고 선선했던 가을도 비 몇 번 오고 나니 금새 추운 겨울에 밀려가 버렸습니다. 옷장 속에 넣어둔 두툼한 외투를 꺼내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계절은 순리대로 움직입니다. 어떻게보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처럼 신비로운 현상도 없을 것입니다. 그 차이는 아마 보는 사람의 감수성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단순한 계절의 변화나 꽃들의 만개 같은 것을 보면서 가슴이 설레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평하는 한 편,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둔감한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어린시절, 학생의 신분일 때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합니다. 친구와의 오해를 풀고 눈물이 찔끔 났던 경험이나, 첫사랑의 설레임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동동거리던 경험은 거의 다 그 시절의 풋풋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고나면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퇴화해 갑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순수하던 김영호(설경구 분)가 결국 악랄한 경찰로 변해가듯 말입니다. 감수성의 퇴화가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아저씨 혹은 아줌마란 대명사를 부여받습니다. 감수성을 현실의 생존과 맞바꾼 대가치고는 썩 유쾌한 호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한 때는 감수성이 넘치고 열정으로 가득찼던 문학도였기 때문입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이전에 '한량의책놀이터' 카카오 스토리채널에서 여름휴가에 읽을만한 책으로 권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현재 한양대 국어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가 실제 강단에서 진행한 수업을 바탕으로 쓴 책이지요.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제목에서 뭔가 느낌이 오지 않은 독자를 위해 부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책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구요. 아마 공대생이 제가 위에서 언급한 아저씨나 아줌마 정도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의 전형인가봅니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그들의 가슴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게 할 수 있는 힘,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며 동시에 아직 우리가 로봇이 아닌 36.5도의 인간이라는 증거이지 않을런지요.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는 서정주, 신경림, 윤동주, 황지우, 박목월 등 여러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등장합니다. 아마 그렇게 시만 있었다면 공대생들의 가슴은 여전히 차고 딱딱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와 노래를 들고 옵니다. 인간의 감정과 심오한 고뇌를 짧은 언어 안에 함축하는 시의 특성상, 깊이 고아내지 않으면 그 참맛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반쯤은 고아서 가지고 온 것이지요. 이야기는 흥미롭고, 이야기에 어울리는 음악 한 자락은 흥취를 돋구어 줍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하루하루 생존 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까닭에 학대당한 내면의 감정들과 아련한 감수성이 서서히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고향이 생각나고, 사랑했던 친구와 첫사랑이 떠오르고, 어리숙했던 옛시절이 아련해집니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가 아닌 그 시절의 내가 아직 그곳에 살아숨쉬고 있었던 겁니다.

시를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한다고 해서 그저 순수문학에 대한 찬미만 늘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엄혹한 현실은 시의 세계에서도 주요한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꼽은 시 중에도 가난한 사랑노래를 부르는 청년에서부터 고향을 잃은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 등 현실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부르는 시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낍니다. 당연히 그것은 순수하게 문학적이라서가 아니겠지요. 바로 우리와 같은 감정과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기 때문일 겝니다. 현실의 절벽 앞에서 고통받는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스펙쌓기를 강권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당신과 같은 경험과 감정을 노래하는 시 한 구절이 아닐까요?


그대, 듣고 있는가? 그리하여 과연 별이 별이 빛나는 밤에, 저 하늘의 별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혹시 우리는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로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외롭게 살아, 그만 하늘의 별조차 잊은 것은 아닐까? 신이 떠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떠나보낸 것은 아닐까?
-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휴머니스트, 2015, 57p.


좋은 시와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많이 소개한 덕분에 독자는 시詩라는, 어렵고 껄끄러운 대상에게 조금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제가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독자들께 권하는 이유입니다. 저자는 시와 독자님의 사이에서 중매를 놓고 있는 것이지요. 중매꾼 답게 저자의 입담이 너무 좋아서 몇몇을 옮기고 싶었으나 남의 혼사에는 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좋은 겨울에 커피와 함께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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