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여기 있냐?

- 완벽한 나를 깨뜨리기 02

by 책리남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1~2월의 취업기간이 돌아왔다. 이미 취업소식을 알려오는 동기들도 있었다. 그에 반면 나는 혼자 생활했고, 대학원 과정 중 그동안 모아 온 돈을 모두 까먹었기에 당장의 생활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연구조교로서 논문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돈이 될만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날 일하면 당일 입금이나 다음 날 입금되는 일을 찾았고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물류센터의 아르바이트일은 간단하다. 물건을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옮기면 된다. 혹은 물건을 전국 각지에 배송하기 전 여러 작업들 중 손쉬운 잡일들을 하면 된다. 사실 방학중에 해본 적이 있어 오랜만에 찾아간 물류센터 일은 나름 수월했다. 그래서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해봤기 때문인 건데... 여하튼, 아르바이트생이 몇 안 필요한 날에도 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직원들의 신뢰를 받았다.


이후에는 물건을 피킹 하고, 적절하게 쌓는 일 등,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 - 즉 직원들이 하는 일도 하게 되었다. 직원이 결번인 날에는 내가 그 자리를 메꿀 정도였고, 직원을 해보는 게 어떻냐는 제의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내가 숙련된 것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취업이 되지 않았기에 숙련된 알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을 일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모든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게 되었고 친해진 직원들도 있었다. 한 번은 잔소리가 많고 참견을 잘하는 형님이 나에게 이것저것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나이, 사는 곳, 아파트를 사는지, 뭐하다 왔는지, 앞으로 뭐할 것인지 등등. 이래저래 그래도 대학 잘 나오고 석사까지 졸업했는데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 게 의아했나 보다.


"너는 왜 여기 있냐? 더 좋은데로 얼른 꺼져버려."


장난식으로 험한 말을 담는 형님의 말에 웃다가도 생각했다. 좋은 자리란 뭘까. 이곳 물류센터의 일은 대학원 졸업생이 내가 해서는 안된 일인 건가. 물론, 내 전공을 살린다는 측면에서는 안 좋은 곳이긴 하다. 하지만 그 형님의 말 뜻 안에는 '그렇게 배웠으면 더 좋은 직업을 가져야지, 이런 일을 왜 하냐'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곳 물류센터는 H라는 슈퍼의 물건들을 배송해주는 역할을 한다. H라는 슈퍼는 나도 종종 이용한다. 물류센터의 이 직원들과 알바들이 없다면 나는 이 물건들을 집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알바를 하고 들른 H슈퍼에서 내가 피킹 한 물건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뭔가 보람됨을 느끼는 날도 있었다.


그 형님이 또 '너는 왜 여기 있냐'식으로 장난을 치길래 조금은 정색하는 말투로 하지만 나도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이곳 물류센터가 있기 때문에 내가 어제 닭볶음탕을 해 먹을 수 있었다고. 지금 행사하는 꼬깔콘을 싸게 1+1으로 구입해서 맛있게 먹었다고. 그리고 여기 일 내 적성에 맞는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그냥 머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물류센터 일을 해보니 몸으로 알게 되었다. 직업에는 정말 귀천이 없다. 이 사람이 이 일을 안 하고 있다면, 나는 그만큼의 혜택을 못 누리게 된다. 사람과 사람은 연결되어있다는 말도 그렇다. 이 사람이 없다면 나는 맛있는 닭볶음탕을 못해먹었을 것이다. 1+1의 과자도 못 먹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내 적성에 맞는 업무를 찾아서 그 알바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물류센터의 일도 내 적성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하루 가열하게 몸을 쓰고 일을 하고 나서 집에서 샤워하고 쉴 때의 느낌은 정말 값진 것이었다는 것도.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본인의 소설들에서 노동의 가치와 즐거움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안나 카레니나] 레빈은 본인의 농장을 운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과 같이 풀을 베며 값진 노동의 땀을 흘린 후 그 행복과 기쁨을 이야기한다. 나는 6개월간 레빈이 느꼈던 그 감정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았었다.


이후 그 형님은 나보다 먼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정확히는 내가 알바 중에 일을 그만둔 거겠지만.


"성공하면 연락해라 xx야. 로또 돼도 연락하고."


그러면서 번호도 안 알려주면서 그런 말을 하냐고 내가 타박하니, '인연이면 다 알게 되어 있어 인마'라고 했다. 그곳에서 알바라는 주변인이었던 나를 어느 정도 직원들과 잘 섞이게 해 주고 어울려준 형님이었다. 번호를 다시 물어보니깐 딴 얘기를 했다. '니 적성에 여기가 맞아도, 다른 적성도 있으니 웬만하면 그걸 살리라'라고. 너는 왜 여기 있냐고 타박하던 그 형님을 만날 수 있어서 난 다행이었다. 너는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본다면, 필요해서 있는 거라고, 그리고 형님을 만나려고 있었나 보다고 농담을 건네고 싶다. 아마 껄껄껄 웃겠지. 구수한 욕을 담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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