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낭비 : 작업물 날렸을 때 정신 승리하는 법
원래는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잦았다. 컴퓨터로 작업하고, 컴퓨터 하면서 쉬고. 작업하다가, 영상도 보고, 게임도 하고... 작업과 휴식을 컴퓨터 하나로 해결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다 보니 집에까지 가서 컴퓨터를 켜고 싶은 마음은 뚝 뚝 줄어들었다.
자택의 컴퓨터들은 자주 봐주지 않는다고 반항이라도 하는 건지, 전원을 켤 때마다 블루스크린을 한 번씩 띄우곤 한다. 이젠 그 모습도 익숙해져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강 건너 블루스크린을 구경하며 다른 할 일을 마치고 재부팅이 끝날 때쯤에서야 모니터 앞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웬 컴퓨터 이야기냐고? 단순하게도 작업물을 날렸기 때문이다.
신간 마감 등의 일이 겹칠 때는 바빠지기 전에 미리 브런치 업로드용 세이브 원고를 적어두는데, 그 파일을... 날렸다. 성실하게도 또 다른 세이브 원고를 만들겠답시고 일을 벌였다. 원고를 싹 지우고 생각난 주제만 달랑 적어놓고 덮어씌우기를 해놓은 것이다. 저장만이 디자이너의 살길인데, 이번엔 그 저장이 나를 물 먹였다.
퇴근 전에 글을 다듬으려고 했는데, 텅 빈 파일만이 나를 반겼다. 빠르게 파일 복구하는 법을 검색해보고, 덮어씌우기는 답이 없다는 말에 인터넷 창을 껐다. 그렇다고 퇴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슬픈 마음을 안고 퇴근했다. 집에 가는 길에 지워진 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기분은 무척 암담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다못해 원고마저도 이러한데 중요한 디자인 작업물을 날리면...?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사실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면 프로그램이 버벅거리는 건 흔한 일이다. 프로그램 오류일 수도 있고, 컴퓨터 사양 문제일 수도 있고... 온전히 저장을 안 한 본인의 과실일 수도 있다.
다만 이번 일로 깨달은 건 컴퓨터가 블루스크린을 띄우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인디자인이 갑자기 작업을 못하겠다고 드러누울 때보다도. 온전히 내 실수로 파일을 저장하지 않았다거나, 작업물이 덮어씌워지면... 그때부터 자괴감이 드는 것 같다.
디자이너의 컴퓨터는 무엇보다도 먼저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죽하면 대학 입학 전에 노트북을 구매하러 매장에 갔을 때 직원이 열심히 적당한 사양의 노트북 설명을 하다가 ‘디자인과’라는 이야길 듣자마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다며 고사양의 비싼 노트북 앞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자택의 ‘블루스크린’ 컴퓨터들도 나름 당시의 고사양 출신이다.
편집 디자인 수업을 들을 때 강사님이 해주셨던 말이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어도비 편집 툴들을 비유해주셨던 말인데, 인디자인은 느리지만 착한 친구라고 하셨다. 조금 무겁고 느릴 수는 있어도 착해서 작업물을 완전히 날리게는 두지 않는다고. 작업하다가 인디자인 창이 꺼져도 그 말에 안심하며 창을 다시 켜게 되는 것 같다. 정신없이 급할 때는 이런 생각도 못 하지만, 복구된 파일을 보면 그 말이 떠올라서 조금은 따스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감을 하다 보면 프로그램이 손을 따라오지 않아 덜덜 떨면서 작업하게 된다. 똑딱똑딱,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이거 하나만, 이거 하나만. 하면서 최종 of 최종 수정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을 다 태우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마감 날에는 하얗게 정신이 없는 상태기도 하다.
이왕 비워진 김에 생각해본다. 그 완벽하다는 컴퓨터도 과한 일을 맡으면 버벅대기 마련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컴퓨터보다도 미숙하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인 우리도 과한 일을 맡으면 자연스레 버벅댈 수밖에 없다. 컴퓨터에겐 없는 따스한 마음으로 잠시나마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이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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